[달아래꽃]운명보다 먼저 피어나는 마음

6화. 그날, 내가 바라본 건 한 여인이었다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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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조선의 장터.


연제국 령황제의 유일한 이복동생, 연휘군은 오늘도 조용히 시장 거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흰빛 도는 피부 위로 선명한 이목구비가 자리 잡고, 날렵하게 다듬어진 턱선과 오뚝한 콧대, 깊은 눈매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냈다.

검은 동자 아래로는 조용하지만 강인한 의지가 흐르고 있었으며, 곧은 어깨와 큰 키는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는 존재감을 풍겼다.


비록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나, 자세 하나, 걸음 하나, 말투 하나까지도 그가 명문가의 자제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그래서일까, 연휘군이라는 인물을 감추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전 황제의 후궁 소생으로 태어난 그는, 정통성을 지닌 령황제 다음으로 황위 서열 2위의 자리에 있었다.

본인은 황위에 뜻이 없었으나, 어미의 집착은 그의 삶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속내를 숨긴 채, 해맑고 진지함 없는 사람처럼 비춰지려 애썼다.


어미의 어긋난 욕망 탓에 형과 멀어질 뻔했지만

령황제가 황위를 이은 뒤, 홧병으로 어미가 죽고 혼자가 된 그를 형이자 한 나라의 황제는 외면하지 않았다.

다시 형과 돈독한 관계를 회복한 그는 황실의 그늘 아래에서 묵묵히 곁을 지키는 충실한 동생이 되고자 했다.


오늘 시장에 나선 것도 다름 아닌 그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황족의 신분이라 하여 높은 담장 안에 갇히기보다, 직접 백성들의 삶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고자 했던 것이다.

군걸의 창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숨결들, 그 작은 떨림과 생의 흐름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말 없는 눈빛 속에서 그들의 삶을 읽어내기 위해 그는 오늘도 발걸음을 이 거리로 옮겼다.


시장의 풍경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연휘군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유독 선명하게 들어왔다.

봄기운이 묻어난 부드러운 바람 사이로, 땀을 닦는 상인의 손등, 물건 값을 두고 흥정하는 노부부의 표정,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얽힌 장터의 골목골목이 살아 숨 쉬는 듯 다가왔다.

길가에 늘어선 노점마다 알록달록한 비단 천과 말린 약초, 찐빵과 어묵 냄새가 섞여 코끝을 간질였고, 솟아오르는 김 사이로 어른거리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장면마다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졌다.


주막 앞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웃는 상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상객, 조그만 짐승을 안고 기웃거리는 아이들까지..

그들의 표정은 다채로웠고, 그 속엔 연휘군이 늘 알고 싶었던 ‘백성의 오늘’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는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의 진짜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연휘군의 발걸음을 이끌어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의 귀에 날카롭고 험악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너 이리 와봐! 이 거지새끼가 감히 내 옷을 건드려?!”


장터 한복판, 인파가 몰린 틈새로 시선이 쏠렸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소년 하나가 무뢰배 셋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해진 저고리를 입은 아이는 마치 다람쥐처럼 작고 가녀린 몸을 떨고 있었고, 커다란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무뢰배들은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아이를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욕설과 함께 아이의 멱살을 움켜쥔 손은 지나치게 거칠었고, 소년은 두 발을 허공에 매단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고, 누군가는 애써 외면했다.

장터의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그 순간 얼어붙은 듯 가라앉았고, 어딘가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연휘군은 그 모든 광경을 정확히 꿰뚫어보며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그는 아이의 두려움과 주변의 침묵 속에 숨어 있는 무책임함, 그리고 무뢰배들의 폭력성에서 진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가 움직이려던 찰나, 그 앞을 바람처럼 한 여인이 가로질렀다.


그 여인은 곧장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의 멱살을 잡고 있던 사내의 팔을 힘껏 밀쳐냈다.

멱살을 놓친 무뢰배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 틈을 타 여인은 아이를 재빨리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여인의 팔은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등 뒤로 숨겨내며, 마치 작은 방패처럼 아이 앞에 단단히 서 있었다.

그 눈빛엔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어른거렸지만, 그녀에게 물러섬이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작은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어른들이 한꺼번에 큰소리로 위협하는 겁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그녀에게 쏠렸다.


그 여인은 바로 침선장 월상수의 양녀, 월하화였다.

느슨하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어깨를 따라 부드럽게 흘렀고, 빛을 받으며 은은하게 윤을 냈다.

고운 연분홍 치마저고리 위로 곧은 목선과 단정한 옷매무새가 성숙한 여인의 품격을 자아냈다.

단아한 눈매와 깊게 내려앉은 눈빛에는 예전의 순진함 대신 고요하고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었으며, 오뚝한 콧대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턱선은 그녀의 성숙해진 내면을 반영하듯 안정되어 보였다.


이전의 하화는 철없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던, 현실 세계의 평범한 20대였다.

겉으로는 어른인 척했지만 속은 아직 미숙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채로 자신을 꾸며내곤 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하화는 누구보다 단단하고 단정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바람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 공기마저도 차분하게 만드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 고요한 위엄은 보는 이의 숨마저 멈추게 할 만큼 강렬했고, 마치 시간이 그 순간 멈춰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화는 위축되지 않고, 담담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연이어 그들을 꾸짖었다.


“이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술에 취해 화풀이할 곳을 찾다 겨우 어린아이 하나 붙잡고 있는 겁니까? 부끄러운 줄 아십시요.”


하화를 앞에 둔 무뢰배들은 비웃으며 주먹을 들고 위협했다.


“계집 주제에 오지랖은! 어디서 주둥이 함부로 놀려? 간 쓸개까지 꺼내놨네, 진짜 죽고 싶냐?”


그러자 하화는 눈을 크게 뜬 채 본능처럼 아이를 조금 더 꽉 감싸 안으며 본인 뒤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팔 안에 파묻힌 아이는 온몸을 떨고 있었고, 하화는 그 떨림을 고스란히 감싸 안으며 무뢰배들 앞에 당당히 섰다.

하화의 눈빛은 굳건했다.

두려움과 긴장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음에도, 그녀의 시선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강인한 눈빛이 무뢰배들의 위협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고, 그녀를 둘러싼 공기는 점점 더 짙은 긴장으로 뒤덮였다.


그 순간,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한 사내의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질렀다.

순간적으로 하화의 시야가 어두워졌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눈을 찌푸렸다.


"앗...?"


그림자가 만들어낸 어스름 속에서,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눈앞에 드리워졌다.

하화의 눈 앞엔 깊은 군청빛 도포가 우아하게 퍼졌고,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옷자락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린 그림자에 숨을 들이켰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지?'


은은한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감으며 주변 공기를 갈랐고, 하화의 시선은 바로 앞에 선 남자의 넓고 곧은 등에서 멈췄다.

마치 자신을 대신해 무언가를 막아주는 듯한 그 존재감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을 듯한 뒷 모습과 곧은 등, 우아한 걸음걸이 속에 천천히 분노가 스며들었다.


“사내놈들이 애랑 여인한테 분풀이라니... 하찮고 천박하기 짝이없군...”


“뭐야, 넌 또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냐? 니 계집이냐? 계집 하나 끼고 설치는 거 보니 니놈도 같이 뒤질 팔자인가보다! 오늘 아주 쌍으로 피바람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 본데, 좋다 이거야!”


"죽여버려!!!!"


무뢰배들은 악에 받친 듯 거칠게 달려들었다.

주먹을 휘두르며 위협적으로 덤볐지만, 연휘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바람처럼 가벼웠고, 움직임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첫 번째 놈이 주먹을 뻗자, 연휘군은 반 발짝 옆으로 비켜서며 그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리곤 순식간에 꺾어 뒤로 틀고는, 무릎으로 옆구리를 가격했다.

신음과 함께 놈이 바닥에 구르며 몸을 뒤틀었다.


"끄윽... 이 미친 놈이... 넌 대체 뭐야..."


그가 몸을 움켜쥔 채 흐느끼듯 내뱉는 소리에 연휘군은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제야 술이 조금씩 깨는 것처럼 보이는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머지 둘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연휘군은 그들의 움직임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뒤로 돌며 둘의 공격을 비켜갔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곧장 발등으로 턱을 올려차 그를 멀리 날려버렸다.


남은 한명이 이빨을 드러내며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연휘군은 그 칼이 휘두르기도 전, 날렵하게 그의 손목을 붙잡고 비틀었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휘군의 무릎이 그의 명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숨을 잃은 남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짧은 시간. 연휘군은 단 한 번의 틈도 주지 않고 세 명을 모두 쓰러뜨렸다.

시장 안의 공기는 어느새 정적에 잠겼고, 사람들은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빠른 몸놀림과 단단한 기술로 무뢰배놈들을 하나씩 쓰러뜨려 가는 그의 모습은, 평범한 서민이라기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기량이었다.

쓰러진 자들을 질질 끌어 부축하던 패거리들은, 눈빛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은 연휘군의 차가운 시선을 의식한 듯 부들부들 떨며 물러났다.


“이것들이...! 이번엔 그냥 간다만, 다음에 만나면... 아주...!”


그러나 말끝은 흐려졌고, 겁에 질린 무리는 아이를 가리키며 마지막 기세를 부렸지만 이내 줄행랑쳤다.


“그리고 너! 꼬마! 너도 조심해라! 으윽...!”


장터에는 다시 조용한 숨결이 번졌다.

연휘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전히 아이를 안고 있는 하화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지만, 아이를 먼저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괜찮니? 이제 안전해. 무서웠지?”


하화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이는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품에서 조심스레 물러나더니, 땅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외쳤다.


“아가씨...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하화는 깜짝 놀라 급히 아이를 일으켰다.


“어머! 왜 그래? 얼른 일어나!”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 일으키며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가씨... 치마가... 지저분해졌어요...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하화는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흙먼지 묻은 고사리 같은 손을 털어주었다.


“괜찮아~ 치마는 얼마든지 다시 빨면 돼. 잘못한 건 너가 아니라 어른들이야. 그러니 넌 아무 잘못 없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휘군은 마음 깊은 곳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어떤 명분이나 계산 없이 오직 사람을 향한 진심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는 낯선 여인으로 인해...

연휘군은 하화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고맙소. 그대 덕분에 아이가 무사했소.”


하화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른이 아이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래도... 나리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 혼자선 어찌할 바를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연휘군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순간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스스로도 당황한 듯, 갑작스럽게 뜨거워진 뺨을 느끼며 속으로 '이게 무슨 반응이지?' 하고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재빠르게 소매 끝으로 입가를 가리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괜히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척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며, 얼굴에 남은 붉은 기운을 애써 감춘 채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대처럼 물러서지 않고 몸을 던질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소.”


하화는 연휘군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는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성함이...”


하화는 연휘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조심스레 눈인사를 건넨 후 돌아섰다.

하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휘군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조용히 돌아서 시장 골목 너머로 사라질 때, 그는 무심코 한 발 내딛었다.


"어... 저기!"


무의식중에 나온 목소리. 그러나 이미 하화는 멀어지고 있었고, 그의 시야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연휘군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입가에 작게 번진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결국 이름을 못 들었구만...’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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