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찢겨진 현실, 시작된 과거의 이야기
하화는 꿈에 그리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더 많은 도전과 성장을 기대하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화는 회사 내에서도 손꼽히는 중요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시즌 컬렉션이 아닌, 회사의 핵심 VIP 고객들을 위한 맞춤형 프리미엄 프레젠테이션으로 이어질 특별 기획이었다.
평소라면 수석 디자이너들이 주도했을 이 기획에 신입인 하화가 발탁된 건, 그녀가 입사 초기부터 보여온 독특한 감성과 진심이 담긴 작업들이 고위 디렉터의 눈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기대를 안고 회의실에 들어선 하화는 곧 주제를 듣고 깜짝 놀랐다.
'자연, 하늘, 계절, 그리고 자연스러움.' 보석과 강렬한 색감, 실루엣을 상상했던 그녀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키워드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받은 기회의 의미를 생각하며, 묵묵히 새로운 감성에 다가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순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동시에 책임감을 느끼며 진심을 다해 디자인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그녀를 믿고 맡긴 프로젝트라면,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화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쳤다.
'할 수 있어, 난 이 감성을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어.'
'처음이니까 더 잘해야지. 나만의 자연을, 계절을, 그리고 하늘을 옷으로 풀어낼 거야. 아자!'
회사에 중요한 고객이 직접 참석하는 행사였기에, 그녀는 더욱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의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낸 디자인마다 번번이 막혔고, 그녀의 마음은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작업 테이블 앞에 앉아도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리기 일쑤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무기력함이 밀려와 스케치북을 펼치는 것조차 겁이 났다.
좌절감과 자책이 뒤섞인 날들 속에서, 하화는 문득 자신을 응원해 주던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부모님의 따스한 시선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마치 잊고 있던 숨구멍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미세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더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하화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익숙한 거리 끝, 가까운 공원을 천천히 걷기로 했다.
평소 사람들과 강아지로 북적이던 공원이었지만, 그날따라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오히려 이런 적막함이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어폰을 꽂고 무심히 걷던 그녀는 낯선 표지판 하나를 발견했다.
"어...? 이게 뭐지? 평소엔 못 봤던 곳인데..."
낡고 바랜 화살표 표지판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종이에 그린 듯 엉성한 방향 표시,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화는 잠시 멈칫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같은 화살표 표지판이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같은 표지판...? 같은 길로 돌아온 건가...? 뭐야, 왜 이렇게 섬뜩하지..."
기묘한 기분에 하화는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그 표지판은 다시 나타났다.
심장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이어폰 속 음악 소리마저 멀게 느껴졌다.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하화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무언가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유도하고 있다는 걸.
고민 끝에, 마치 홀린 듯 그녀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그 순간, 툭— 이어폰 한 쪽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화는 고개를 숙여 주우려다 멈칫했다.
바닥엔 낙엽 사이로 검게 타들어간 종이 조각이 있었고, 거기엔 희미하게 손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다리여]
"…누가... 이걸…?"
하화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떨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손끝에 소름이 돋았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주위는 고요했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는 뿌연 안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때—
바람결을 타고 귓가를 스치는 듯한 속삭임.
"다리... 여... 돌... 아..."
하화는 숨을 멈췄다.
그리곤 누군가, 정말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는 오직 앞으로만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도, 동물도 아닌 낮고 낯선 종소리가 숲속에서 울렸다.
그녀는 그 소리에 이끌려 숲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다채로운 색의 띠가 감겨 있는 나무와, 그 앞에 놓인 [서낭당]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있었다.
낡고 빛바랜 나무 기둥에는 기이한 그림과 낙서 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공기 속에 잠겨 있었다.
서낭당은 고요한 숲속에 음울하게 서 있었고, 그 안에서 바람과 방울 소리가 뒤섞인 낮은 울림이 은근하게 흘러나왔다.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임에도 무언가가 안에서 숨 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하화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소름을 느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음산한 분위기 속에 묘한 매혹이 섞이기 시작했다.
나무문 앞에 다다르자, 마치 그녀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오래된 문이 삐걱이며 천천히 열렸다.
그 순간, 안에서는 푸른빛이 새어나왔고, 빛은 마치 생명을 지닌 안개처럼 부드럽게 퍼져 나오며 하화를 감싸 안았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하화는 내부에 펼쳐진 풍경에 숨을 삼켰다.
벽과 천장은 생명력을 품은 듯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빛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공기에는 향긋한 풀 내음과 묘하게 이질적인 금속성 향이 섞여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의식이 끝난 듯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중앙에는 낮은 돌로 쌓아 만든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에는 고운 비단 천이 펼쳐져 있었고,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검정색, 흰색의 천이 각각 사방으로 흘러내리며 신성한 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색들은 마치 자연의 다섯 가지 힘을 상징하듯 제단을 감싸 안고 있었고, 그 위에는 오색찬란한 꽃잎들이 바람 없이도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비들이 날고 있었는데, 그 나비들은 평범한 곤충이라기보다는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환영처럼 느껴졌다.
제단의 뒤편에는 여러 개의 고요한 초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불빛은 흔들림 없이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그 불빛에 비친 벽면에는 누군가의 손으로 정성껏 그려 넣은 듯한 기이한 문양들이 반복되어 있었으며, 그것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하화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이곳이 단순한 신당이 아니며, 무언가 오래된 의식과 신비가 스며든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화는 점점 더 깊이 빨려들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서서히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작은 서낭당 안에는 외부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은 완벽에 가까운 질서와 색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비들의 날갯짓 하나하나마저도 일정한 리듬을 따르고 있는 듯했다.
중앙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신성함이 느껴지는 거대한 벚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은빛 껍질이 오로라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나무의 가지마다 벚꽃이 만개해 있었으며, 꽃잎 하나하나는 반투명한 결정처럼 빛을 품고 있었다.
그 빛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전체 공간을 감싸는 듯했고, 마치 다른 세계와 경계를 허무는 듯한 감각을 주었다.
하화는 눈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벚나무 위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던 하얀 독수리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노란 눈동자를 가진 그 독수리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날개를 펼치고 은빛 벚나무 위를 선회하듯 날아올랐다.
하화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걸음을 옮기다, 마침내 그 나무 앞에 섰다.
나무는 마치 그녀의 접근을 감지한 듯 진동하듯 은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껍질의 은빛 결이 오로라처럼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 순간, 독수리가 나무 꼭대기 가지를 스치듯 지나가자 나뭇가지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떨어졌다.
하화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그 손이 나무의 중심 줄기에 닿는 순간 나무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오로라가 폭발하듯 퍼지며 그녀의 몸을 감쌌다.
빛은 입자처럼 흩날리며 그녀의 팔과 어깨, 얼굴을 부드럽게 타고 흘렀고, 마치 무중력 공간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순간, 그녀의 의식이 먼 곳으로 끌려가듯 가벼워졌고, 눈앞의 풍경은 서서히 흩어지며 다른 차원의 빛으로 전환되었다.
... 그리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는 전혀 다른 곳에 누워있었다.
푸르른 숲속, 빛가닥들이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얼굴과 바닥 위에 격자무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의 따스함과 눈부심이 서서히 그녀의 눈꺼풀을 자극했고, 하화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깨어났다.
눈앞에는 이전의 서낭당도, 은빛 벚나무도.. 그의 오로라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앙상한 가지만 남은 한 그루의 나무와, 낯선 숲들이 펼쳐져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던 벚나무는 더 이상 아무런 기운도 발하지 않은 채,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것처럼 잎 하나 없이 죽은 나무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하화는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여긴 어디야...?"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당황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 난, 서낭당 안에 있었는데..."
하화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몇 걸음 물러섰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숨을 고르려 했지만, 심장은 요동치듯 뛰고 있었다.
"설마... 꿈...? 아니야, 이건 너무 생생해."
그녀는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아까까지 있었던 서낭당도, 산책로에서 보이던 높은 건물들도 없었다.
단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새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올 뿐. 무언가 너무 낯설고 조용했다.
"핸드폰...!"
하화는 급히 주머니를 뒤졌지만, 핸드폰은 없었다.
그제야 자신의 옷차림이 낡고 해진 걸 깨달았다.
마치 시간을 통째로 건너뛴 듯한 위화감.
하화는 주저앉을 뻔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그녀는 이제야 확신했다.
이곳은 자신이 알던 서울도, 2027년도 아니었다. 이곳은...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 서기 470년, 연제국.
그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 아까 봤던 하얀 독수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노란 눈동자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치 이끄는 듯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하화는 마치 마법에 홀린 듯, 그 독수리를 쫓아 급히 숲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독수리가 앞장서 날아가며, 그녀는 나무들 사이로 길을 헤쳐 나갔다.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독수리는 더욱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높이며 정신없이 따라갔다.
숨이 차올랐고, 발끝이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심장은 요동쳤다.
"잠깐만... 왜 이렇게 가는 거야...? 어디까지 가는 건데..."
그 순간, 예고도 없이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꺅!”
충격에 휘청이며 그녀는 비틀거렸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던 찰나, 거칠고 낯선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
"야, 너 뭐 하는 거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하화는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의 남자는 시대극에서 본 것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표정은 경계와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 무슨... 저기요, 제 팔 좀...”
그녀는 말을 잇기도 전에 남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하화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차림새도 이상하고, 말투도 이상하고... 니년이냐? 도망친 노비년이?”
“아니에요,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정말로 저는... 그냥...”
하화는 차마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상황을 수습하려 애쓸 뿐이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남자의 손은 더 세게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주변엔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고, 속삭임과 수군거림이 잇따랐다.
“이상하게 생긴 계집이야.”
“아까부터 저 사람들이 찾던 그 노비년 아냐?!!!!”
“저봐봐!! 맞는거 같은데?!”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고, 하화는 당혹감에 말문이 막혔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그는 하화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며 비웃었고, 하화는 도망을 치려 했지만 금방 다시 붙잡혔다.
하화는 몰골이 말이 아닌 자신을 보며, 그가 자신을 도망친 노비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황에 놀라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차분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리 따라와라!"
"저기...!!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저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하화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자기 노비인 마냥 잡아가려 그녀의 팔을 더욱더 세게 끌었다.
하화는 당황한 채로 그의 손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주변에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 몰려와 그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계집을 주웠네? 생떼를 부리는 것을 보아하니 그냥 계집은 아닌 것 같고... 이년은 오늘부로 *난구다~ 당장 끌고 가!"
*난구 : 노비를 사고팔 때의 가격을 뜻하며, 주로 노비 시장에서 사용되었던 용어
다른 노비들이 하화를 감싸 잡아가려고 할 때,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곳이 과거 어딘지도 모르는 세계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이곳에서 길거리 정신 나간 계집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하화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허무하게 그들의 손아귀에 잡혀, 그녀는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노비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곳은 자유와 희망을 빼앗긴 어두운 세계였다.
낮과 밤을 막론하고 노비들에게는 끊임없는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벗어나기 위한 희망조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며 하화는 점점 현실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고 하늘의 색이 달라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되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고 그 감정은 서서히 체념으로 바뀌었다.
정신없이 반복되는 노동과 감시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이름조차 잊히는 듯한 나날을 보냈다.
누군가 그녀를 불러줄 일이 없으니, 스스로 속삭이며 기억해야만 했다.
'나는 월하화다... 난... 나는...'
그리고 그렇게,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하화는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이곳은 본인이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본인이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며, 이제 이곳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인정해버리고 있었다.
그 밝디밝았던 하화는 이제는 없다.
어두운 밤, 고된 노동 후 오늘도 하화는 지친 몸을 작은 멍석 위에 올렸다.
마치 다시 뜨지 않는 태양으로 힘을 잃어버린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