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현실의 문, 세 번째 운명이 깨어나다

3화. 너를 만난 건 필연이야

by 주미쁨


- 2027년 대한민국, 서울 종로.


해가 지기 직전의 하늘은 마치 수채화 물감이 번지듯, 보랏빛과 주황빛이 겹쳐진 채 도심을 물들였다.

고층 건물들이 서로의 그림자를 덧칠하듯 도열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걷고 있었다.

누구도 서로를 보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은 사람, 핸드폰만 바라보는 사람,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걷는 사람.


그 가운데, 한 여자가 길모퉁이에 멈춰 서 있었다.

긴 생머리를 가진 그녀는 유난히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눈가엔 금세라도 흐를 듯한 눈물이 맺혀 있었고, 손엔 두꺼운 포트폴리오 파일과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야...? 분명 6번 출구였는데...”


지도 앱은 계속해서 재설정 중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지도를 확대하고 회전시키고, 다시 되돌려보며 몇 번이고 혼잣말을 되뇌었다.

시간은 이미 약속된 제출 시각을 훌쩍 넘기고 있었고, 그녀의 발끝은 조급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어디야... 정말 왜 이렇게 복잡해... 친구들이 미리미리 확인하랬잖아...’


그녀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본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갑자기 외쳤다.


“저기다!!”


민망할 틈도 없이 포트폴리오 파일을 꽉 끌어안고 그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있었다.


‘제발... 제발 아직 늦지 않았길... 그냥 메일로 제출하면 안 되는 거였냐고... 요즘 세상에... 오프라인 제출이 뭐야...’


도착한 건물은 단순한 회사 건물이라기엔 너무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황금빛 손잡이가 달린 유리문은 해 질 녘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고, 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설 뻔했다.


안쪽은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처럼 아름다웠다.

광택이 살아 있는 대리석 바닥엔 조명과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천장엔 웅장한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 고급스러운 벽지와 세련된 인테리어가 펼쳐져 있었고, 중앙엔 작은 분수와 그 주변을 감싸는 실내 정원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신기할 만큼 고요했고, 이 낯선 공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하화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숨을 고르듯 짧게 들이쉰 그녀는, 이곳이 정말 같은 세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포니테일을 깔끔하게 묶은 여직원이 퍼플 컬러가 포인트인 유니폼을 입고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OVER STYLE SHOP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기... 저... 오늘 여기서 하는 신입 디자이너 공모전에 포트폴리오 제출하러 왔는데요... 길을 잃어서 늦었어요... 혹시 지금도 제출할 수 있을까요...?”


직원은 우측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2층 제2 회의실에서 접수하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쯤 정리 중일 수도 있어요. 올라가 보시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도 잊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몇 계단씩 건너뛰며 올라가던 그녀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한 걸음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도착한 2층 회의실 앞, 그녀는 두 눈을 의심했다.

현수막은 이미 반쯤 걷혀 있었고, 테이블을 정리하던 스태프들이 하나둘 상자를 들고 나가고 있었다.


“저기요! 공모전 제출... 혹시 아직 가능한가요?”


한 여직원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오셨어요? 방금 다 정리했는데요...”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 손에 들고 있던 포트폴리오 파일은 무릎 위로 툭, 떨어지듯 내려앉았고, 손끝마저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뚝 떨어진 것처럼 가슴이 텅 비었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귓가에선 웅- 하는 소리가 울렸고, 주위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눈앞은 흐릿했고, 발끝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진짜... 끝난 거야?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해보고...?’


한 줄기 후회가 가슴을 찢고 들어왔다.

바보처럼 믿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머릿속은 그간의 노력과 기대가 하나씩 무너지는 잔해로 가득했다.

눈물이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게 뭐야... 이걸 얼마나 준비했는데... 서류도 못 내보고 끝났다고...?’


억울함, 분노, 후회,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무도 다가와 주지 않았다.

모두들 정리하느라 바빴고, 그녀의 조용한 절망은 그저 그림자처럼 묻혀갔다.


“하화씨?”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놀란 듯 고개를 든 하화는, 바로 앞에 서 있는 한 여성을 마주했다.

차분한 톤의 목소리, 깔끔하게 정돈된 말투.

그녀는 블랙 세미핏 정장에 푸른빛 하이힐을 신은 단정한 인상이었다.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넘겨져 있었고, 메이크업은 과하지 않았지만 또렷했다.

전체적으로 세련됐고, 단 한 가지 흐트러짐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화는 순간, 그 여성이 단순한 직원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어디서나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이 정돈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OVER STYLE SHOP – 여하연’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이름 석 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무게가 실감났다.

그런 여하연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다정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하화를 바라봤다.


‘...제 이름을... 어떻게...’


“메일로 이력서랑 포트폴리오 보냈던 월하화씨.. 맞죠? 제가 그 메일을 받았어요. 기억나요. 근데... 여기서 울고 계시면 제가 너무 놀라잖아요.”


하화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말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게... 제출하려고 왔는데... 길을 잃어서... 시간도 지나버리고...”


하연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하화가 들고 있는 포트폴리오로 옮겼다.

그 눈빛엔 묘한 호기심과 기대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포트폴리오... 저한테 주고 가요.”


하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하니 바라보다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네... 지금요?”

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메일로 이력서 받았을 때부터, 하화씨 디자인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어요.

실물 포트폴리오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걸 지금 제 손으로 받을 수 있다면, 전 그걸로 충분해요.”


그 말 한마디에 하화의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울음이 터질 듯 벅차오르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을 건네는 순간, 손끝에서 작게 떨림이 느껴졌다.


“정말... 보실 건가요...?”


그 질문에 하연은 잠시 눈을 마주보다가,

마치 아주 단순한 사실이라도 말하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이렇게 만났잖아요. 이건... 그냥 스쳐가는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전... 이런 인연, 절대 그냥 넘기지 않거든요.”


하화는 그 순간,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너져 있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었고,

그제야 처음으로 어깨에 힘이 풀렸다.


하화는 고개 숙여 연신 인사를 하고,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건물을 나섰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손등을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다행이었다.


그 순간, 창가에 조용히 서 있던 하연이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앞의 유리창 너머로 작아져 가는 하화의 뒷모습을 보며, 낮은 숨결로 혼잣말을 뱉었다.


“월하화... 다시 만났구나, 다리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 끝엔 묘하게 눌린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시선이 조용히 책상 위로 향했다.

그곳엔 하화가 건네고 간 포트폴리오가 놓여 있었다.


천천히 손끝으로 파일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각기 다른 분위기와 색감을 지닌 디자인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든 스케치 안엔 하연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익숙한 문양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한 벌, 또 한 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그 자수는 더욱 선명했다.

옷의 스타일도, 콘셉트도 모두 달랐지만 그 작은 자수 하나가 마치 실타래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고 있었다.

하연은 숨을 삼키며, 아주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기억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본능인 건가~? 궁금하네?’


그녀의 손끝이 문득 멈췄다.

페이지 한 장에 그려진 마지막 스케치.

그 안의 자수 문양은, 분명 그녀만이 알고 있는 옛 상징이었다.


하연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속으로 한 단어를 천천히 되뇌었다.

'...깨어나고 있어.'



- 며칠 후


작은 동네 카페.

창가 쪽 자리, 따스한 햇살이 테이블 위를 비추는 그곳에 하화와 친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하화는 손끝이 얼어붙은 것처럼 마우스를 붙잡고 있었다.

그 앞엔 노트북 화면.

잠시 후, 결과 발표가 예정돼 있다.


“심장 쫄깃해... 시간 거의 다 됐어.”

수정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야... 나 못 누르겠어... 누가 대신 눌러줘. 진짜 손이 안 가...”

하화가 속삭이듯 말하자, 옆에서 친구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ㅋㅋ 너 열심히 준비했잖아. 이제와서 도망가면 어떡해ㅋㅋㅋ”


“아니 진짜로...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이게 너무 무서워서그래... 내 심장 지금 120 넘었을걸...”


“그럼 내가 눌러버린다???!!!”

수정이 장난스럽게 손을 뻗었고, 하화는 황급히 마우스를 움켜쥐었다.


“안 돼!! 아직 준비 안 됐단 말이야...!”


“그놈에 준비는 언제되는데 ㅋㅋㅋ”


“기다려봐, 진짜... 숨만 좀 쉬고...”


하지만 그 순간, 수정이 기습적으로 마우스를 ‘딸깍’ 눌러버렸다.

모두가 동시에 숨을 멈췄다.

하화는 비명을 참듯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노트북 화면엔, 로딩 아이콘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몇 초 후, 한 줄의 문장이 화면 위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 13422 월하화 : 합격



“......됐어.”


하화는 손바닥 사이로 살며시 눈을 떴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합격’이라는 두 글자.


“됐어!!! 나... 됐어!!!!”


하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고,

카페 안은 곧장 친구들의 환호와 박수, 그리고 진심 어린 탄성으로 가득 찼다.


“으아아아악!! 미쳤어, 너 진짜 됐어!!!”


“헐 대박... 야!! 너 진짜 붙은 거야!!”


하화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번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증표였다.


“나 진짜 된 거야... 이게... 진짜지...?”


“너 이제 진짜 디자이너야. 이제 시작이라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 자신의 이름이 또렷하게 떠 있는 그 장면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분명히...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화는 마음 깊은 곳에서 확신했다.

이 모든 길고 긴 여정, 끝내 무너졌던 하루,

그럼에도 끝까지 버텼던 그 감정.


모든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이건 진짜...... 필연이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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