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피로 물든 전장 위, 첫번째 운명이 깨어나다
- 서기 256년, 연제국 개국 6년.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 태양빛이 들판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찬란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들판 위에는 핏빛으로 물든 시체들이 나뒹굴고..
그 사이에서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서로를 공격했다.
전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음과 비명이 가득 차올랐고, 슬픔과 절망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전장은 잔혹한 악몽과도 같았다. 병사들은 고통과 혼란에 빠진 채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미 죽음을 목격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내 편과 적의 경계가 희미해진 가운데, 눈물을 머금고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자도 있었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병사들은 마치 거친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처럼 필사적으로 마지막 희망을 붙잡으려 했다.
그들의 비명은 들판을 가득 메웠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마치 악몽 속에서 도망치는 이들처럼 혼란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비현실적이었다.
병사들은 점차 인간성을 잃어갔고, 그들의 영혼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부신 태양 아래 펼쳐진 이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병사들은 잔혹한 운명과 싸우며 끝없는 절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전쟁 대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아스테리국은, 연제국을 속국으로 삼아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였다.
허나 개국한 지 채 6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연제국 앞에서조차, 그들의 발걸음은 뜻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빠르게 끝날 전쟁이라 믿었거늘... 이토록 오래 끌 줄은, 차마 예기치 못하였도다. 식량도, 물자도 모자랄진대 어찌 그리도 사기가 높단 말인가. 도무지, 무엇이 그들을 저토록 지탱케 하는 것인지!!”
아스테리국의 대장군 상둑은 분노에 차 소리쳤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쉽게 이길 줄 알았던 전쟁이 예상 외로 길어지자 그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친 바람처럼 지휘실을 가득 채웠다.
지휘실은 긴장감으로 가득차 올랐으며 장수들은 서로눈치만 볼 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 끝까지 버텨주신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우리는 반드시 승전보를 울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다른 장수들도 그 말을 지지하며 맞장구쳤다.
상둑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고, 이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호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한 사내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는 상둑의 책사로, 날렵한 체구와 예리한 눈빛을 지닌 젊은 인물이었다.
언제나 냉철한 기운이 서린 얼굴에는 깊은 통찰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상둑의 곁에서 여러 전투를 함께하며 지략을 펼쳐온 신뢰받는 책사였다.
“장군, 감히 아뢰옵니다.
이 전쟁이 길어지는 까닭은 단순한 물자나 사기의 문제가 아니옵니다.
저들은 무언가 깊은 신념을 품은 채 싸우고 있사옵니다. 그 믿음이 저들의 힘이 되어 주고 있사온데,
우리 병사들은 쉬운 승리를 기대하였기에 오히려 사기가 점점 꺾이고 있사옵니다.
이대로는 어렵사옵니다. 저들의 사기를 꺾을 묘책이 시급하옵니다. 전략을 다시 세워야 할 때이옵니다.”
"뜻이 무엇이냐?"
"적진 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하나 있사옵니다.
그 자는 가장 앞에서 적을 베어내며 전장을 누비고, 장수들 위에 서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사옵니다."
"연제국의 병사들은 그 자만 있다면 절대 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하옵니다. 허나 우리는 이미 수천의 병사를 잃었사온데,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나이다."
연호의 말을 듣던 장수들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놈! 그 입이 어디서 그런 망령된 소리를 내뱉는 것이더냐! 감히 전쟁을 논하고 대장군의 뜻을 거스르다니, 제 정신이냐! 네놈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감히 입을 놀리는 것이냐! 본디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나 운 좋게 책사 자리에 오른 주제에... 그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대장군께서 너 같은 놈을 곁에 둔 것이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순간 방금 내뱉은 말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그도 스스로 알아차린 듯했다.
돌연 정적이 흘렀고, 자리에 있던 이들은 일제히 상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상둑이 낮고도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그 입으로... 무어라 하였느냐?"
'아... 대장군, 그게... 그 뜻이 아니오라...!"
그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 쾅!!!
"내가... 그따위 말은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누차 경고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감히, 감히 내 앞에서 다시 그 말을 입에 올린단 말이냐!"
상둑의 분노가 대전 안을 진동시키듯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내리꽂혔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송구하옵니다...! 정말 송구하옵니다, 장군!"
"다시는... 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겠사옵니다. 제발... 용서를..."
그는 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고개를 숙인 채 떨며 사죄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장군들 역시 고개를 깊이 숙이며 연달아 입을 열었다.
"장군, 부하의 실언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모두 저희의 불찰이옵니다."
그때, 연호가 조용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눈빛엔 망설임이 없었고, 상둑을 향한 시선은 결연했다.
"장군."
연호는 상둑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대장군께 아뢰옵니다. 어찌 미천한 제가 감히 다른 장군들께 불편함을 드릴 수 있겠사옵니까.
소인이 천한 노비 출신인 것 또한 사실이오며, 아까의 말이 장군들께 불쾌함을 드린 것 또한 부정하지 않겠사옵니다.
허나... 그 뜻에는 어떠한 사사로움도 없었사오니, 부디 장군의 넓은 아량으로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는 연호의 말의 짧은 고민 후 입을 열었다.
"내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이 시간부로 감히 연호를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연제국의 적병이 아니라 그자의 목부터 벨 것이니라. 연호는 폐하께서 친히 인정하신 책사이니, 그의 말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곧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명확히 알아들었는가?"
"예, 장군!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간은 계속 흘렀고, 조급해진 아스테르국은 연제국으로 상대로 총공격을 시작할 준비를 하였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연제국 내 영토에서 이따금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스테리국의 공격이 시작되자 연제국의 기지에서는 병사들이 일순간 우왕좌왕했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고 금방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장군들은 무기를 챙기고 병사들 앞에 당당히 나섰다.
그때, 한 남자가 말 한 필 없이 검은 하늘을 가르는 별처럼 장군들 사이로 서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덩치 큰 장군들과는 달리, 몇 개의 갑옷 조각만을 걸친 큰 키에 마른 모습이었다.
검은 긴 머리를 틀어 올린 그의 모습은 마치 밤하늘에 뜬 날카로운 초승달처럼 빛났다.
그의 어깨 갑옷은 어두워지고 있던 달빛을 받아 새벽과 같이 반짝였고, 손에 들린 붉은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칼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했다.
그 칼과 같은 눈빛을 가진 자, 그의 눈은 깊고 차가운 바다처럼 빛났다.
그가 걸어 나오자 많은 이들은 그의 길을 만들 듯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존재감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바위를 갈라내는 듯 강렬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그 속에는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고 그 순간, 그는 들고 있던 검을 하늘을 향해 높이 올렸다.
검은 번개처럼 하늘을 가르며 올라갔고, 그와 동시에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은빛 검 끝에서 반사된 햇빛이 병사들의 눈을 찔렀고, 그들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목격한 듯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그 검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실처럼, 그들의 희망과 결의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이 남자는 단순히 무기를 휘두르는 전사가 아니라, 그들의 희망을 담아내는 존재였다.
그의 검은 그들이 품은 모든 두려움과 의심을 날려버리는 빛이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영웅과 같았고, 그의 발걸음은 그들이 따를 길을 제시하는 등불이었다.
병사들은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고, 그들의 결의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들의 눈빛은 그 남자의 눈빛과 같은 빛을 발하며, 그들의 가슴속에는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희가 피를 흘리기 전에, 내가 먼저 피를 흘릴 것이며, 너희가 죽음을 마주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음과 맞설 것이니라! 그러하니, 나를 믿고, 곁에 선 전우를 믿어라! 내가 쓰러지지 않는 한, 죽음은 결코 너희를 덮지 못할 것이다! 자, 모두 함께 싸우러 나서자!"
사내의 말 몇 마디에 모든 병사는 서로를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곤 가차 없이 칼을 치켜들었다.
상대 병사가 본인에게 칼을 겨눌 때도, 순간 죽음이 눈에 보일 때도, 정말 그들의 눈앞에는 그자가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는 모든 이를 대신해 칼을 휘둘렀고, 모든 이를 대표해 앞장섰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갈대가 꺾이듯 아스리테국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고, 그의 솜씨에 적국의 병사들은 당황하며 등을 보이기 일쑤였으며, 그는 그런 자들을 놓치는 일 없이 단칼에 베었다.
그때 저 멀리서 아스테리국 대장군과 그를 호위하는 장군 하나가 연제국 병사들을 하나하나 베며 앞으로 전진 중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마주 섰고, 상둑은 한 번에 그가 연호가 말한 자임을 눈치챘다.
"너였느냐... 저 많은 병사들과 장수를 이끄는 자가."
상둑은 은빛 갑옷 사이로 빛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칼끝을 천천히 내렸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구나. 나는 아스테리국 대장군 상둑이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상대는 잠시 침묵한 채 그를 바라보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 이름은... 은검이다."
"은검이라... 궁금했었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저들이 그토록 믿고 따르는 것이며, 목숨까지 걸고 충성을 바치는 것인지."
상둑은 은검에게 진정으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검이 침묵을 지키자 상둑은 예상대로라는 표정을 지으며 칼을 다시 고쳐잡았다.
"아깝게도, 너의 재주와 재능은 오늘 내 칼날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니라. 너의 목이 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연제국 또한 내 발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야."
그러곤 둘의 검은 끊임없이 부딪쳤다.
상둑은 처음에는 자신만만했지만, 점점 은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단순한 힘이나 속도가 아닌, 완벽한 타이밍과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상둑이 방어하려는 순간마다 은검의 칼날이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였고, 작은 틈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 검술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고, 상둑은 자신이 점점 그 물살에 휩쓸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칼끝을 맞댈 때마다, 상둑은 자신의 힘이 점차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팔은 어느순간 무거워졌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은검은 마치 상대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듯, 상둑의 힘이 빠지는 순간을 정확히 노려 점점 더 강한 압박을 가했다.
상둑은 필사적으로 칼을 휘둘렀지만, 은검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그것을 흘려내며 상둑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둑은 이제 칼을 간신히 붙들고 있다.
평생을 함께한 이 칼이 지금은 마치 무거운 쇳덩이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애쓰는 칼날은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졌다.
상둑은 자기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지며, 마치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은검의 눈빛은 차갑게 빛나고, 그의 움직임은 한 폭의 그림처럼 느리면서도 확실했다.
상둑은 점점 어지러워지는 시야 속에서, 은검의 존재가 자신을 서서히 압도하는 것을 느꼈다.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 상둑은 자신이 패배의 그림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이런..."
칼의 무거움이, 두려움이, 본인의 힘이 다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은 이미 상둑에겐 너무 늦었다.
그 두꺼운 상둑의 금빛 갑옷 뒤로 날카로운 칼끝이 나타났고, 그 끝에 붉은색 핏방울을 맺혔다.
그때 그의 손에서는 칼이 툭 하고 떨어지며 그 자리 그대로 무릎 꿇으며 주저앉았다.
은검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상둑에게서 칼을 빼내자 은검의 칼끝에는 상둑의 붉은 피들이 매섭게 떨어졌다. 그때 저 멀리서 쓰러진 상둑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책사, 연호였다.
"장군!!"
그는 쓰러진 상둑을 부여잡았으나 상둑은 그저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네 이놈! 감히!"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떨리는 손으로 땅에 떨어져 있던 상둑의 칼을 들었다.
하지만 칼을 쥐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평정심마저 잃어버리자 그 칼끝은 그저 흩날리는 꽃과 같았다.
그는 결국 몇 번의 칼부림을 끝으로 대장군 상둑이 그러하였듯 은검의 칼에 주저앉았다.
은검은 둘을 번갈아 바라본 후 뒤를 돌아 걸어갔다.
그 순간 쓰러진 연호는 남은 힘을 짜내어 상둑의 칼을 들어 있는 힘껏 은검를 향해 상둑의 칼을 던졌다.
그가 던진 칼은 은검의 오른쪽 어깨를 스쳐 지나갔고, 이내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은빛 갑옷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때 은검의 손가락에는 옅지만, 붉은색 피 한줄기가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렸다.
은검은 피가 흐르는 본인의 손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연호의 힘없는 눈에는 땅에 떨어진 상둑의 검을 들어 본인에게 던지는 은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희미해지는 검은 배경으로 바뀌었다.
은검은 피가 흐르고 있는 자기 팔을 바라보다 이내 바닥에서 흔들리던 천 조각 하나를 찢어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처 위에 휘감았고, 다시 한번 상둑과 연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은검의 찢어진 옷깃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은빛 벚꽃 모양의 표식이 은은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