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래꽃]연회의 베일, 두 번째 운명이 웃다

2화. 가장 조용한 전장, 차향 속 밀담

by 주미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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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287년 연제국 개국 37년, 인나라 황궁


연제국의 상징, 황금빛 봉황이 수 놓인 노리개를 단 한 여인이 검 붉은색 한복을 입고, 흑색 베일을 두른 채 고요한 차실에 앉아 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꿈결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신비롭고, 은밀한 매력을 발산했다. 남자들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그녀의 태도는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러나 그녀와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초조하게 문밖을 바라보며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베일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완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밤하늘 별빛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숨겨진 비밀을 품고 있는 듯 깊고도 맑았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그녀는 부드럽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차실의 공기는 무겁고,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남자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차를 홀짝였고, 이내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이토록 고운 밤에 귀한 분들과 차를 나눌 수 있음이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분들께 예를 올리나이다. 연제국에 여가 하연이라 하옵니다. 이제 시각이 제법 깊어졌으니, 슬슬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도 은은했으며, 마치 바람에 실린 속삭임처럼 귀에 맴돌며 마침내 그녀의 별빛 같은 눈동자가 하나씩 남자들을 응시하기 시작했다.그녀의 말에 남자들은 순간적으로 주춤하며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의 긴장된 표정 속에 한층 더 깊어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곤 그들은 하연에게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들은 듯 놀라는 것도 잠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반응했다. 그녀 앞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인나라 대신들이었다.


"...? 다른 이가 오는 것이 아니라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오? 이게 무슨 처사인가! 우리가 하려는 것은 단순한 연회가 아니라, 중대한 외교 문제이거늘!! 이런 식으로 계집을...!! 연제국은 도대체 무슨 뜻이오?"


그들은 역정을 내며 하나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 여인은 전혀 흔들림 없이 차를 마셨다. 그 모습에 일어났던 인나라 대신들은 더욱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꼈다. 그때 조용히 차를 마시던 그 여인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그들의 반응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떠나실 분이 계시다면, 지금 이 자리를 나서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나서신다면.. 연제국과 인나라의 인연도 더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잊으신 듯합니다만, 이 자리는 저희 황제 폐하께서 인나라 폐하와 함께 어렵게 만들어 주신 자리입니다. 누가 나왔든, 그 꼴랑한 자존심에 마련해 주신 자리를 이렇게 저버리시는 분들이라면 저희도 더 이상에 의미는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는 찻잔을 들어 베일 안으로 넣어 한입 마셨다. 분명 비꼬는 듯 들이는 말이나 틀린 말은 없다. 그녀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인나라 대신들이었지만 그 누구도 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나가지는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 반대편 중앙에 앉아있던 인나라 승상, 최평수가 입을 열었다.


"먼저, 이사람들의 언행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마 전달에 착오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자리의 중요성을 저 또한 깊이 알고 있으니 다시 한번 적절한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는 우리와 대화를 나눌 만한 적임자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연제국과의 만남을 저버리겠다는 뜻은 아니니, 부디 이 점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그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끝내고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그때 하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


"승상, 최평수 나리시지요. 이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늘 이후 더 이상의 만남은 없을겝니다. 그걸 아시기에 인나라 황제께서도 이 미천한 계집이 나오는 것을 아시면서도 이리 높으신 승상과 대신 분들을 보내신 거니까요. 말씀드린 대로 그대로 나가셔도 됩니다. 저는 분명. 잡지 않.겠.다. 말씀 드렸습니다."


승상을 제외한 대신들이 돌아가며 예의가 없다는 둥, 하찮은 년이라는 둥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도 그녀는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녀 또한 승상 최평수 외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를 마시고 내려놓기를 반복하다 이내 부채를 들었다. 결국 최평수는 깊은숨을 한번 내쉬곤 다시금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마음을 정하셨나 봅니다. 서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전하고, 얻어 가는 자리에서 사내는 무엇이고 계집은 무엇입니까? 혹여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 연제국에서 사내가 왔다고 해서 대신들께서 원하는 것이 달라지오리까, 저희가 원하는 것이 달라지오리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만 서 계시는 분들께는 지금 이 권유가... 마지막 권유가 될것입니다. 결정하시지요."


그녀는 들고 있던 부채를 찻잔 옆에 살포시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인나라 대신들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냉정하면서도 차갑고, 다정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 채 최승상의 눈치를 보다가 한 명씩 다시 자리에 앉았다.


최평수가 적막을 깨며 먼저 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게라도 웅성대던 소리와 헛기침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자들이 말을 험하게 한 것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이해합니다. 여인의 몸으로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 어찌 앉아있겠습니까?"


"고맙소, 그럼 연제국에서 원하는 바를 먼저 들어보도록 하지요."


"그럼, 시간이 이미 많이 지체되었고, 정다운 인사도 이 정도면 충분한 듯하니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현재 저희의 국력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병력과 실력을 자랑하고 있사옵니다. 그러하니, 이를 뒷받침할 장인들의 손길이 그만큼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무기를 쓰는 자들은 넘쳐나나 만드는 자들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러할 때 더욱이 부러지지 않는 칼, 뚫리지 않는 방패, 흔들림 없는 갑옷을 만드는 장인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인나라 대장장이들을 저희에게 보내 주십시오. 그렇다면 저희 연제국 장수들이 인나라를 함께 지킬 것입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대신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최승상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미 최승상이 사과하게 만든 것이 있어 그들은 더 이상 먼저 나서서 호통을 칠 수도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최승상은 순간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소. 우리 쪽 장인들을 그쪽으로 보내었다가 그대 말대로 병력과 실력이 넘치는 연제국에서 공격해오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 아니오? 우리도 스스로 지키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오."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승상"


"... 연제국에서만 가지고 있는 수나라 와의 교역권을 나누길 원합니다. 수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재료들과 토를 가지고 있으나 아무리 해도 연제국 외에는 교역을 금하고 있고, 본인들의 모든 교역 또한 연제국을 통해서만 하고 있으니 우리 인나라를 포함한 모든 나라가 수나라와 직접적인 교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부분을 연제국에서 해결해 주시지요."


그녀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베일 속으로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내려놓은 부채를 다시 집어 들었다.


"교역권이라.. 황제 폐하와 수나라 폐하께 허락이 필요한 일이겠군요. 참으로 어려운 부탁인 건 아시지요~ 승상 나리."


"이리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어보니 그대에게는 이 일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그저 뜬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야기인데... 수나라 단독 외교권을 가져온 자. 연제국 외에 다른 나라와의 모든 교역을 끊게 만든 자. 그자가 여인이라는 소문이 돌더군요. 그때는 말도 안된다 설마 하였고 그게 사실이라 하여도 믿을 수 없으나 오늘 그대를 보니 그 소문이 뜬소문은 아니라 생각이 드는데 맞습니까?"


다시 한번 찻주전자를 들어 본인의 잔을 채운 그녀는 차를 한입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고 승상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그 질문에 대답하여도 지금 대화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을 터... 그럼 말씀하신 것처럼, 수나라 교역권을 인나라에서도 쓸 수 있도록 해보지요.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수나라 외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수나라 황제께 말씀드려 인나라와 수나라의 교역을 위한 길을 열겠습니다. 하지만 교역권을 나눠 드렸다 한들 그 이후에 유지하는 것은 인나라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교역권을 나눈 후까지 내 사정을 봐 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 이후는 우리 쪽에서 잘 이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서로 원하는 바는 잘 전달된 것 같으니 보내는 대장장이 인원과 날짜는 추후에 서신을 보내 주십시오. 그 협의가 원활하게 끝난 후에~ 제가 직접 수황제를 뵈러 갈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나 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서론이 너무 길었던 바 돌아갈 길이 먼데 이미 많이 지쳐서 말입니다."


그녀는 승상 최평수와의 대화를 마치고 살포시 일어나 그에게 가벼운 목례 후 뒤를 돌아 나왔다. 하연은 자리를 떠나며 자신의 정체를 숨긴 듯 보이지만, 그녀의 행동과 태도는 대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연의 빈자리를 보며, 최평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모두... 저 여인을 보고 드는 생각이 없었는가, 저 사람, 확신이 있었네. 수나라 교역권을 나눈다는 것은 저 여인이 말한 것처럼 연제국 황제의 허락뿐 아니라 수황제의 허락까지도 필요한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저 여인은 확신했어. 가능하다는 확신... 불가능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눈빛, 나와 대화 중 한 번도 그녀의 눈빛은 당황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네. 지금 그녀와 대화를 나눈 이 순간이 마치 꿈속에서 헤맨 기분이구려"


정신을 다잡기 위해 승상 최평수는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본다. 그리고 바로 연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하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그녀의 시중을 들고자 인나라 궁녀들이 다가온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마마"


그녀는 웃으며 궁녀들에게 거절에 손짓한다.


"아닙니다. 옷 정도는 직접 벗고 입음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마마..."


"마음만 받겠습니다. 저는 제국에서도 의복 시중은 받지 않습니다. 그대들이 불편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마음만 받는 것을 이해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마마, 그럼 앞에 있을 테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불러주시어요~"


궁녀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하연은 베일을 먼저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저고리를 벗어 먼저 놓은 베일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때 저고리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따라 올라가자 그녀의 어깨에는 은빛 벚꽃 모양의 표식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신분과 정체성을 알려주는 상징이었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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