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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lololol Dec 18. 2024

평생 간직하고 싶은 시와 선생님

삶이 끝없이 내려앉던 어느 날이었다. 손목을 그어 스스로 삶을 멈추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몸은 다치고 마음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결국 나는 두 번째 질병휴직에 들어갔다. 모든 게 무너져버린 것 같았다. 집에 틀어박혀 창밖을 바라보며 흐르는 시간을 멍하니 보낼 뿐이었다. 봄볕이 아무리 따스해도 내 안은 침울한 겨울이었다. 호흡조차 버거운 나날이었다.


하루는 천변을 따라 정처 없이 걷다가 조금 멀리 갔는데, 아파트 단지 앞에 작은 건물들이 몇 개 보여서 계속 갔다. 그러다 "00가정복지상담지원센터"라는 현판에 걸음을 멈췄다. 들어갈까 말까 수차례 고민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고 담당 직원분께 사정을 알렸다. 그분은 나에게 잠시 앉아서 차 한잔하면서 기다리라 하고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지금은 상담선생님들이 다들 내담자들이 있으셔서 어렵겠는데요..."

"잠시만요, 한 군데 더 전화 좀 해볼게요."

직원분의 화색이 밝게 바뀌면서 오시더니,

"이 선생님은 이번에 은퇴를 하셨는데 방문하신 분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자신이 맡으시겠다고 하시네요."


이렇게 선생님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정처 없이 걷다가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도 우연이었고, 막 은퇴하신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선생님은 어머니처럼 포근한 인상과 따뜻한 미소를 가진 분이었다. 처음에는 그분의 미소조차 내 마음에 닿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상담이 이어지면서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그녀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내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내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느 날은 내가 흐느끼며 절망과 분노를 쏟아냈고, 또 다른 날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그 모든 시간을 그녀는 묵묵히 내 곁에서 함께해 주었다.

6회기 상담이 모두 끝날 무렵, 카페에서 맛있는 차를 사주시겠다면 부르시더니 내게 작은 책을 건네셨다.

“이건 훈이 씨를 위한 선물이에요. 힘들 때마다 한 장씩 읽어보세요.”


그 책의 제목은 <평생 간직하고 싶은 시집>이었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펴서 넘기는데 그 안에서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붙어 서서

결국 그 벽을 넘고야 마는

푸른 넝쿨을 손에 쥐고

우리가 돌아온다.

담쟁이 -도종환


나는 그 시를 읽으며 눈시울 뜨겁게 소리 삼키며 울었다.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절망은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나는 그 벽을 넘을 수 없을 거라고 믿었고, 그래서 아예 포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담쟁이덩굴은 다르다. 작은 빨판 하나에 의지해 벽을 기어오르고, 결국 그 벽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내게도 그런 억척스러운 빨판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이 내게 준 그 시를 붙잡았다.

그날 이후로 마을 골목길에서 담쟁이를 볼 때마다 이 시와 선생님이 떠올랐다. 담쟁이는 마치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버텨야 한다. 벽은 언젠가 넘을 수 있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되찾았다.

​여러 해가 지났고 열심히 일하며 살다가 나는 또다시

질병휴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 있다. 그래서 마음속에는 깊은 불안과 막막함이 자리를 잡고 있다. 책장을 열어 시집을 꺼내 든다. 한 장, 한 장 시를 넘길 때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실까? 선생님이 보고 싶구나.

내게 있어 이 시집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살린 선물이고, 선생님과의 특별한 연결고리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다시 삶의 벽을 오를 수 있도록 해주는 빨판이다. 나는 이 시집과 선생님을 평생 간직할 것이다. 그들이 내 삶에 남긴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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