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이라는 이름의 화살 (ep.19)

균열과 균형 사이

by lululala


#19. 익명이라는 이름의 화살


월요일 아침, 인재육성팀 사무실은 올해 교육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팀장 김현철은 회의실 테이블 한쪽에 앉아 준비된 자료를 검토하며 말했다.


"올해 특히 신경 써야 하는 교육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관리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교육. 둘째, 부서별 현장 맞춤형 역량 강화 프로그램. 그리고 셋째, 법정 의무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선호 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팀장님, 법정 의무교육은 매년 반복되니까 직원들 반응이 냉랭한 것 같아요. 교육에 대한 관심을 높이려면 뭔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현철은 자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맞아요. 특히 성희롱 예방교육이나 산업안전교육 같은 법정 교육은 우리가 반드시 진행해야 하지만, 직원들은 이걸 의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그렇다고 빼먹을 수는 없습니다. 법적 요건도 있지만, 제대로 진행하지 않으면 우리 팀이 가장 먼저 지적받을 겁니다."


박기호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법정 교육인데 그냥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요? 가끔 너무 직원들 눈치 보는 거 아닌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교육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수용도가 높아지지 않을까요?"

김현철은 박기호를 보며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박기호는 팀장의 의견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때 이선호 대리가 아이디어를 냈다.

"최근 사례를 들어 교육을 진행하면 좀 더 현실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난해 진행했던 리더십 워크숍에서 사례 중심의 접근이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었잖아요. 그냥 이론만 나열하면 다들 흥미를 잃잖아요."


김나영 대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블라인드에서 종종 나오는 부정적인 댓글을 사례로 활용하는 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에서의 과도한 발언이 조직 문화를 얼마나 훼손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현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새로운 접근이네요.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체감할 수도 있겠네요. 또 다른 아이디어를 추가해서 이번 주 안으로 교육 커리큘럼을 최종 확정합시다."


회의는 그렇게 별다른 일 없이 끝났고, 모두들 자리로 돌아가 평소처럼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선호가 스마트폰을 보며 외쳤다.


"팀장님, 이거 보셨어요? 블라인드에 우리 팀 얘기가 올라왔습니다."


김현철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요?"


이선호는 화면을 넘기며 말했다. "여기요, 제목이 '육성팀, 리더십의 문제인가?'인데, 내용이... 'P 과장, 직원들에게 너무 엄격하고 자기주장만 앞세움. 조직 분위기 흐리는 주범.' 이렇게..."


순식간에 사무실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옆에 있던 최수연 주임이 눈치를 보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켰다.


'이번에는 또 무슨 내용이지?' 하는 궁금증과 동시에 혹여 자신도 블라인드에 나왔을지 걱정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무실의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고는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괜한 말로 상황을 더 악화시킬까 봐 조심스러웠다.


한동안 사무실은 정적에 휩싸였고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모두가 박기호 과장을 흘끗 쳐다봤지만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박기호는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재육성팀을 저격한 블라인드 글에 댓글이 계속 달렸다.


"P 과장이 그 정도라고? 근데 팀장 H도 문제 아닌가? 리더십 약하다던데."


"P? 옛날부터 그랬다니까. 생긴 것부터 꼬장꼬장. 꼰대가 따로 없어요 아주."


"대리 중에 L 있잖아. 실행력 없고 말만 많던데. 직원들 귀찮게만 하고."


각종 추측이 난무하며 댓글은 어느덧 30개를 훌쩍 넘어섰다. 김현철은 차마 댓글을 끝까지 읽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댓글 한 줄 한 줄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무겁게 꽂히는 것만 같았다.


'팀장이 책임감도 없고 존재감도 없다'는 글을 읽을 때는 손끝이 떨렸다.

그는 화면을 끄고 한숨을 쉬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손은 또다시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었다.


잠시 화면을 닫았다가도 다시 확인하며 한숨을 내쉬기를 몇 번. 그는 업무에 집중하려 했지만, 본능적으로 화면을 다시 열어 댓글을 확인했다.


"내가 그렇게 부족했나. 리더십에 문제가 많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김현철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박기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블라인드 앱에 고정돼 있었고, 그곳에는 'P 과장 같은 사람이 왜 아직도 회사에 있는지 의문'이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는 조용히 화면을 껐지만,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굴이 굳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며, 이윽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꼰대처럼 보였나요?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팀원들을 힘들게 했던 건가요?" 목소리는 담담하려 했지만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말을 내뱉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가뜩이나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더욱 냉랭해졌다.


이선호는 블라인드 글을 읽고 불안해졌다. '말만 많고 실행력 없는 대리'라는 댓글이 자신을 겨냥한 것 같았다. 그는 최수연 주임에게 물었다. "혹시 이거 나를 말하는 걸까요? 내가 문제라는 뜻인가?"


최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마세요. 누군지 특정할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차마 이선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이선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박기호는 하루종일 얼굴이 굳어 있었다. 김나영 대리는 박기호의 날 선 표정을 보며 말문을 열려다 다시 닫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복도에서 다른 팀 직원들이 지나가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사 안에서 누가 이런 글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안 좋더라."

"그런 걸 쓰는 사람은 분명 누군가를 겨냥한 걸 텐데, 좀 그러네."


"블라인드 얘기 봤어? 육성팀 꼰대 얘기 맞다더라."

"맞아. H 팀장은 조용하던데, 그런 팀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겠어."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지만 이미 예민해진 인재육성팀의 귀에는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다.


시계는 어느덧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먼저 밥을 먹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김현철은 무거운 침묵을 깨고 식당으로 가자며 팀원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어렵사리 식당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주위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육성팀 얘기 봤어? 블라인드 난리던데."

"맞아. P 과장이 꼰대라고? 팀장은 뭐 하는 거야?"


박기호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멈췄고, 이선호는 물만 마시며 시선을 피했다. 김나영은 조용히 눈치를 보며 상황을 살폈다.


김현철은 밥을 뜨려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대화는커녕 식사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고,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지만, 그들의 식사는 서둘러 끝이 났다.


김현철은 팀원들이 서로를 의심하지 않길 바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블라인드 글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에요. 모두 평소처럼 업무에 집중합시다."




며칠 후, 블라인드 앱의 글은 새로운 이야기로 묻혔지만, 인재육성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익명의 비난은 박기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회의 중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보다 조용히 자료를 정리하는 데만 집중했다.


이선호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업무 중에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작업 중간에도 스마트폰 화면을 슬쩍 확인하며 블라인드에 자신의 이름이 더 나오는지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혹시 팀의 문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김현철은 퇴근 전 모두를 불러 짧게 이야기했다.

"여러분, 익명의 글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서로를 믿고, 더 나아질 방법을 함께 찾아봅시다."


그러나 팀원들의 무거운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되어 김현철은 지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다시 블라인드 앱을 열었다. 새 글은 없었지만, 여전히 댓글들이 떠올랐다. '팀장이 책임감이 없다'는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라고 혼잣말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기호는 퇴근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블라인드에 쓰인 댓글들로 가득했다.


"P 과장이 팀 분위기를 망친다"는 말이 특히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잘못한 걸까? 아니면, 누군가 과장되게 표현한 걸까?' 그는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자신의 노력과 열정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점점 흐려졌다. 그간 자신이 노력해 왔던 모든 일들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꼰대라고 지적받은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고작 한두 문장이 그의 모든 노력을 평가절하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이선호는 퇴근 후 카페에 들러 노트북을 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이디어는 많지만 실행력이 부족하다'는 문장이 맴돌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 보고서를 열어 차례로 검토하며 부족했던 부분을 찾으려 했다.


카페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다음엔 더 잘해야 한다'는 다짐은 했지만, 자신감이 꺾인 상태에서 더 나아질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박소연은 모두가 퇴근한 뒤 사무실에 남아 천천히 책상을 정리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메모장을 꺼냈다. 'P 과장이 꼰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팀원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그녀는 적었다.


이어서 '다음 회의에서는 팀원들이 더 편안하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겠어.'라고 덧붙였다. 책상 위에 남겨진 메모는 그녀의 조용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블라인드 글에 자신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느낀 불안감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이번 블라인드 사건은 인재육성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익명성이 보장된 공간은 직원들에게 솔직한 대화의 장이 되기도 했지만, 그 익명성 뒤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들은 보는 이들을 너무나 힘들게 했다.


댓글 하나하나가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팀 전체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팀원들 간의 신뢰에 금이 가고, 불필요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도 했다.


한편 이번 일로 직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동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동시에 악의적인 비난보다 개선해야 할 부분에 대해 차분히 얘기하는 자리가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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