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 속에서 싹튼 희망 (ep.20)

균열과 균형 사이

by lululala


#20. 균열 속에서 싹튼 희망


수요일 아침, 김현철 팀장은 사무실에 일찍 출근해 커피를 한 잔 내려 책상에 앉았다. 새벽에 잠을 설친 그는 일찍 짐을 챙겨 나왔다.


지난 며칠간 김현철은 고민이 깊었다. 자신의 팀을 비난하는 글이 블라인드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과 직원들을 비난하는 것보다 팀원들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게 무엇보다 마음이 아팠다.


블라인드 사건 이후, 팀원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고, 그 긴장은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말끝이 날카로워지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었다. 오늘은 팀 회의가 필요했다.


‘회의에서 팀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김현철은 결과를 예상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상황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팀원들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더 커질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내 역할이겠지.’


시계가 9시 30분을 지날 무렵 인재육성팀이 모두 회의실에 모였다. 블라인드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사무실 한쪽에 자리한 회의실은 어색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김현철 팀장이 정적을 깨고 회의를 시작했다.


“다들 지난 며칠간 많이 힘들었죠. 하지만 계속 이렇게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입니다. 블라인드 사건으로 느낀 점이 있다면 솔직히 얘기 나눠봅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현철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지쳐 보였고, 허공을 향해 있었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팀원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긴 침묵을 깬 건 박기호 과장이었다.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블라인드 글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익명으로 떠도는 말에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하죠?”


이선호 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에는 억눌린 분노와 피로가 서려 있었다. “과장님, 하지만 그 글이 저를 겨냥한 것 같아서요. ‘아이디어는 많지만 실행력이 없다’는 말이 꼭 저를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솔직히 그게 스트레스였어요.”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가요?” 박기호는 이선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런 글에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요.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흔들릴 이유가 있나요?”


“중요하지 않다고요?” 이선호는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그 글 때문에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영향을 받았잖아요. 팀 분위기가 완전히 무너졌다고요.”


최수연 주임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이선호 대리님 의견에 동의해요. 블라인드 글이 우리 팀의 문제를 드러낸 건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 팀 내에서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그녀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저도 팀 내에서 소외감을 느낀 적이 있어서 더 신경 쓰였던 것 같아요.”


회의는 갈수록 감정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김현철은 팀원들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때 김나영 대리가 말을 꺼냈다.

“팀장님, 사실 블라인드 사건은 우리 팀 내 소통의 문제를 드러낸 것 같아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기회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팀 워크숍을 통해 신뢰를 다시 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김나영의 제안이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김현철이 경직된 표정을 풀며 김나영의 제안에 호응했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김나영 대리.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팀원들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최수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누구도 선뜻 워크숍을 가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최강우 경영혁신본부장이 들어섰다.

“여기서 무슨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나누고 있나?” 최강우는 회의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현철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본부장님, 저희 회의 중이었습니다.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최강우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다면 잠시 들어봐도 되겠지. 요즘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 때문에 걱정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궁금해서.”


김현철은 순간 놀랐다. 최강우 본부장이 블라인드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이런 건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말 다 알고 계셨구나.’


그는 침착하게 팀의 논의 내용을 설명했다. 김나영 대리의 팀 워크숍 아이디어와 팀 내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전달했다.


최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방향성인 것 같군.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팀이 이렇게까지 흔들린 이유를 어떻게 보나?”


이선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 팀 내부에서 신뢰가 부족했던 점도 원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소통이 부족하다 보니 작은 문제도 크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박기호 과장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익명성이 주는 자유는 존중하지만, 그것이 무책임한 비난으로 변질되었을 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번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최강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리더십은 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해야 합니다. 팀워크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번 사건은 우리가 부족했던 부분을 보여준 동시에, 개선할 기회도 준 것 같아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더 강한 팀을 만들어 보길 바랍니다.”


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김현철에게 짧게 덧붙였다.

“팀장으로서 어려운 상황이었겠지만, 당신의 리더십이 팀을 다시 세울 거라 믿습니다.”




본부장이 떠난 뒤에도 회의실은 한동안 조용했다. 모두들 본부장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김현철은 최강우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리더십은 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해야 한다.” 그 말은 팀장으로서 책임감을 일깨우는 동시에, 이번 사건이 자신의 리더십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김현철은 부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내가 팀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그는 직원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팀원들이 겪는 상처와 불안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도 멀었어. 하지만 시작은 했잖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더 고민해봐야 해.’


박기호는 손에 쥔 펜을 돌리며 본부장이 말한 “개선할 기회”라는 표현을 곱씹었다.

‘내가 팀 분위기를 더 편하게 바꿀 수 있을까? 블라인드 글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속으로 질문을 되뇌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이렇게 진지한데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겠지.’


이선호는 고개를 숙인 채 수첩을 바라봤다.

자신의 부족함을 꼬집은 블라인드 글이 떠오르자 쓴웃음이 나왔다.

‘다시 시작하면 될까? 아니, 이번엔 다르게 해 보자. 정말.’ 이대로 끝내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나영은 자신이 제안했던 워크숍이 실제로 도움이 될지 걱정스러웠다.

‘혹시 이게 실패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불편해지면 어떡하지? 내가 괜히 나섰다가 문제가 더 커지는 거 아냐?’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작은 희망의 불씨도 남아 있었다.

'그래도 바뀌어야 하잖아. 뭐라도 해보자'


한편 최수연은 팀원들의 표정을 살피며 느낀 무거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게 다 뭐람. 이런다고 좋아질까? 서로 생각이 다른 데 워크숍으로 갑자기 변한다고?'

그녀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김현철 팀장은 팀원들이 회의실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모두 다 저마다의 불안을 안고 있구나. 해결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어. 그래도 시작해야 하는 일이잖아.’

그는 자신에게조차 충분히 설득되지 않은 확신을 다잡으려 했다.


그날 오후, 인재육성팀은 여전히 무거운 침묵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한편에는 어렴풋한 변화의 조짐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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