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면서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공부를 하면서 보는 논문, 일을 하면서 찾는 자료 정도였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할 때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학교 다니면서 그래도 공부를 꽤 했기도 했고, 나에게는 영영 사전과 번역기가 있으니까.
그런데 미국에 오면서 내가 알고 있는 영어 단어가 굉장히 편협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민주주의(democracy), 경제자본(economic capital), 관료주의(bureaucracy)라는 단어는 알지만 주근깨(freckle), 여드름(pimple), 검버섯(age spot)은 알지 못했다. 물론 고등학교 때 외웠을 수도 있지만 위의 단어만큼 바로 생각나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영양소(nutrient), 탄수화물(carbohydrate), 채식주의 (vegetarianism)라는 단어는 알지만 청경채(bok choy), 살구(apricot), 국자(ladle)라는 단어는 사전을 찾아봐야 했다. 미국의 식료품 점을 갈 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와 실제를 맞춰보기에 급급했다.
나는 대학/대학원까지 포함하여 약 20여 년의 정규 교과 과정을 통해 영어를 배웠는데 대체 무슨 단어들을 알고 있는 것이지..
이런 건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간단한 단어들은 생각이 나서 말을 하지 못하고 물어보고 찾아보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내가 전문적인 단어들을 능청스럽고도 자연스럽게 얘기하면 함께 동료들이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 그런 단어는 어떻게 알아? 영어 공부를 많이 하나 보다.. 나도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어쩌다가 그들이 생각하는 고급 단어들을 이렇게나 많이 알게 되었을까.. 정작 생활하면서 필요한 영어들은 모르는 것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그렇게 오늘도 “세면대 밑에 물이 새요.”라는 말을 번역기로 돌려 보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