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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말고 while (22)

밤편지 -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김동률)

by 박경민


포니테일을 단정히 묶은 그녀가 들어서자, 바 안의 공기가 아주 짧게 흔들렸다가, 곧 잔잔히 가라앉았다.
미연은 문턱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그를 발견했다. 눈길이 맞닿는 순간, 일주일 전 함께했던 밤의 분위기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오래전, 누군가가 ‘사랑’이라 믿었던 바로 그 미소가 이 순간, 다시 그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미연은 그 환한 미소를 보고,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 조용히 앉았다.
지난주에 함께했던 테이블에 다시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엔, 말 대신 환한 웃음이 먼저 스며들었다.
잠시 후 웃음이 가라앉자, 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훈이라고 해요. 지난주에는 이름도 못 물어봤네요.”
미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연이에요.”
이름이 오가는 순간, 둘 사이에 있던 공기의 온도가 조금 더 따뜻해지는 듯했다.


23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5월 23일.

그날 이후 일주일이 흘렀다.


미연.

알람을 두 번이나 미뤘다가, 세 번째에서야 눈을 떴다. 평소 같으면 스스로를 다그쳤겠지만, 밤새 깊이 잔 탓인지 오히려 상쾌했다. 미연은 다리를 살짝 들었다가 반동을 이용해 몸을 번쩍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오늘은… 목요일이지.’

얇은 커튼 사이로 번져 들어온 햇살이 방 안을 환히 비췄다. 오늘은 왠지, 하늘도 마음도 맑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이 목요일이야!"

짧은 숨을 내뱉고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스치자, 며칠째 쌓여 있던 피로와 긴장감이 조금은 벗겨지는 듯했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한참 동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탕을 다지고 색을 얹는 화장이 ‘일의 일부’처럼 느껴졌는데,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가벼운 화장 위에 연한 립밤을 스쳤다. 그뿐이었다.

미연은 거울을 보며 활짝 웃어 보이고는,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단정하고 자연스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머리는 풀어 내린 채로 빗어 정리하다가, 그대로 두기엔 뭔가 어색해 언제나처럼 낮게 묶어 포니테일로 정리했다. 하지만 오늘의 포니테일은 회사에서 다잡던 매무새와는 달랐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부드럽게 흔들렸다.

옷장을 열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블라우스 대신 하얀 셔츠를 집어 들었다.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는 위에서부터 단추 세 개를 풀어, 바람이 드나들 수 있게 열어 두었다. 아래로는 청바지를 매치했다. 오랫동안 옷장 구석에 박혀 있던 녀석이지만, 오늘의 복장에는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리고 손목에는 시계 대신 작은 은팔찌를 채웠다.

시간을 쫓는 대신, 오늘의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발끝에 펌프스 대신 흰 스니커즈를 신고 현관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전보다 한결 가볍고 자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셔츠 깃을 한 번 더 정리하며 미소 지었다. 오늘의 미연은 며칠 전의 자신과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기도 했다. 굳이 차갑게 무장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아니 이제는 조금 더 자유로워도, 조금 더 솔직해도 괜찮을 것이다.


바쁘게 흘러간 오전 업무가 막 끝나갈 무렵, 미연은 상담실 책상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익숙한 조건표를 다시 펼쳐 놓았지만, 눈길은 자꾸만 종이의 바깥으로 미끄러졌다.

학력, 직업, 소득, 성격, 가족 배경.

차례차례 채워져야 하는 항목들이 오늘따라 낯설게만 보였다.

‘이 조건들이 다 맞춰지면, 정말 사랑이 완성되는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두 사람의 프로필을 나란히 맞춰보고 있었다. 한쪽에는 안정적인 직장과 반듯한 학벌, 다른 쪽에는 다소 부족한 조건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부족해 보이는 쪽에서 떠오르는 미소와 사소한 말버릇 같은 것들이 자꾸 마음을 잡아끌었다.

“조건상 불리하다.”

메모엔 그렇게 적혀 있었지만, 그 문장이 곧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지난주 밤, 바에서 나눴던 대화가 불쑥 떠올랐다.

'while문. 단순한 조건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 반복하는 것.'

그 말을 꺼냈던 남자의 표정이 문득 생생하게 겹쳐졌다.

미연은 깊게 숨을 내쉬고는, 조건표 한쪽 귀퉁이에 무심코 작은 원을 그렸다. 돌고 도는 선이 이어지다가 겹쳐지는 그 모양이,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오래 머물렀다.

‘오늘 바에 간다면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난주 학동역 앞에서 그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다가, 그녀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또다시 if문이라니…’

미연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그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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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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