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완)

개방된 세계

by 박경민

4화. 개방된 세계


수연은 다리가 풀리며 쏟아지는 복도의 빛 속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문 앞에 웅크려 있던 아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이의 눈이 수연을 올려다보았다. 놀람과 안도가 한꺼번에 섞인 눈. 아이의 작고 따뜻한 몸이 수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과거에 차마 안아주지 못했던 자신과 엄마, 그리고 수민이가 한꺼번에 수연의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수연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스스로에게 건네는 첫 번째 인사를 뱉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수연의 눈에서 눈물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아이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고, 숨이 짧게 끊겼다. 아이의 가느다란 울음이 어깨에 닿을 때마다, 수연의 가슴도 함께 떨렸다.

수연은 문 뒤에 서 있던 ‘그 아이’의 눈물이 자신의 뺨을 따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무언가가 뜨거운 눈물이 되어 그 두 사람의 눈에서 계속해서 왈칵왈칵 쏟아져내렸다.

조금 진정이 된 옆집 아이는 그런 수연을 바라보았다.

“아줌마, 이제 괜찮아요. 이제 안 무서워요.”

수연은 그 말을 듣고 아이를 더 꼭 껴안았다. 아이의 체온이 온전히 그녀의 품 안으로 전해졌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수연은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이제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수연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이제 정말 나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이제 정말 괜찮아요.”

잠시 뒤, 아이의 할머니가 헐떡이며 복도를 달려왔다.

손녀를 안고 울고 있는 낯선 여자를 보고 처음엔 경계했지만, 그 울음이 쉽게 그치지 않자 표정이 누그러졌다.

“아가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수연은 할머니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아이를 안았던 팔을 천천히 풀며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끝없이 쏟아지던 눈물은 이제 소리 없는 흐느낌이 되어 어깨를 잘게 흔들고 있었다. 할머니는 수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전의 정적과는 달랐다.

수연은 아이의 온기가 사라진 빈 팔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땀과 눈물로 젖은 셔츠가 복도의 미지근한 공기에 식으며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그녀는 얼룩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집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거실 한복판에 서서 다시 집안을 둘러보았다. 안방, 작은방, 욕실. 벽에 고정되어 있던 모든 문들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그러나 이제 그 공간들은 숨을 곳이 없어 두려운 사각지대가 아니었다. 그저 바람이 드나들고 빛이 머무는, 비어있는 통로일 뿐이었다.

수연은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거실 구석, 창백한 은회색 잎을 떨구고 있던 올리브 나무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올리브 나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화분을 들어 올리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화분을 들기 전, 잎사귀 하나를 손끝으로 살며시 만져보았다. 은회색의 잎은 얇았지만 단단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이 좁은 거실 구석에서 인공적인 조명에 의지해 버텨온 나무가 대견하면서도 미안했다. 나무는 말없이 수연의 고립을 공유해온 유일한 목격자였다. 수연은 화분의 굽은 곡선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이제 너도 진짜 빛을 보게 될 거야.'

화분 바닥이 바닥과 떨어질 때 나는 둔탁한 마찰음이 정적을 깨웠지만, 수연은 더 이상 그 소리에 놀라지 않았다.

수연은 화분을 들고 베란다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박경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글쓰기를 시작해봅니다. 하고 싶었던, 미루고 미뤘던. - 비판적인 시선, 따뜻한 마음으로 아니 어쩌면 비판적인 마음, 따뜻한 시선으로

2,756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5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13화올리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