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후기

by 박경민


올리브는,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양자컴퓨터 관련 동영상으로 시작된 이야기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는 개념을 풀어놓은 '양자컴퓨터'라는 기술 에세이였고,

두 번째는 사무실에서 AI와 양자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던 남자의 순간에 중첩과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접목한 '새로운 친구'라는 단편소설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올리브'.

역시 양자역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양자의 얽힘과 동시성을 이야기에 녹여내었으니까요.


전 동시성이라는 현상이 우리 머릿속에 잡힌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걷어내면 이해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유는, 양자란 빅뱅 이전 태초의 우주부터 존재했던 물질이고, 시공간은 빅뱅으로 우주가 팽창되면서 생긴 개념이므로, 양자는 시공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자는 시공간이 아무리 커져도 태초의 우주에서와 똑같은 성질로 존재하는 거죠.

이야기가 너무 옆길로 빠졌네요.


어쨌든, 저는 이번 소설을 통해 주인공이 동시성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동시성은 시공간이 무의미한 것이니,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영향을 받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주는 건 이해가 되지만,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준다? 그게 가능할까요?


수연은 과거의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문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문을 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가 꾸준하게 현재의 존재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거죠.

소설에서, 어느 날 옆집 아이가 문을 두드릴 때 수연은 과거에 문 뒤에 숨었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옆 집 아이를 위해, 과거를 변화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문을 열기로 결심하죠. 그 행위가 결국 과거의 자신에게도 문을 열어주면서, 그때 '비겁함'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현재의 선택이 과거의 '비겁했던 나'를 '두려움에 떨던 나'로 변화시키면서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에게 동시에 영향을 주는 거죠. 현재가 과거를 변화시킨 겁니다. '동시'에 말이죠.


이렇게 양자의 가장 큰 특징이라 생각하는 중첩과 얽힘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네요.

아마도 이야기가 계속된다면 '새로운 친구'를 만난 남자가 작가가 되어 양자컴퓨터에 대한 책을 썼고, 그걸 수연이가 읽고 있다가 동시성을 경험한 상황이 되겠죠. (소파 위에 놓인 책, 기억하시죠?)

남자는 양자컴퓨터에 대한 책을 쓰긴 했지만,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 했습니다. 회사생활을 계속하면서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죠. 물론 글은 계속 쓰고 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서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납니다.

유난히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여자. 수연이죠. 그리고 모임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책이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말하는 거죠. 그 책을 쓴 남자 앞에서... 그 남자가 그 책을 쓴 작가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올리브가 마지막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런 흐름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쓰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이야기와 꼭 맞는 양자의 특징을 우연히 알게 된다면, 쓸 수 있으려나요.




아마도, 이런 느낌?


토요일 오후의 북카페 '오라클'은 이름답게 커다란 통유리창을 통해 12월의 겨울 햇살을 가감 없이 받아내고 있었다. 2년 전, 그가 그토록 답답해하던 사무실의 미지근한 난방 바람과는 다른, 코끝이 찡하면서도 정수리는 따스한 진짜 겨울의 공기였다. 경민은 갈라진 입술 대신,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라일락 향 핸드크림을 손등에 펴 발랐다. 그는 1쇄를 찍은 지 이년 만에 2쇄를 찍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자신의 책이 의미 없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민은 예약석 푯말이 놓인 긴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자신의 저서 <양자컴퓨터: 닫힌 계를 여는 법>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잠시 후 시작될 모임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한 탓에 테이블은 아직 비어 있었다. 그때,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저... 실례합니다. 혹시 오늘 양자컴퓨터 독서모임 오신 분인가요?"

​맑고 투명한 목소리에 경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유난히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선 그녀의 어깨 주위로 '은회색 빛'이 감도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모서리가 조금 닳은 그의 책이 들려 있었다.

​"아, 네. 맞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왔네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안녕하세요. 전 수연이라고 해요. 미리 와서 다시 읽어두려고 서둘렀는데, 저보다 더 빠른 분이 계셨네요."

​수연은 경민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이 책을 쓴 작가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설레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모임원들이 하나둘 도착하며 카페 안이 소란해지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수연이 문득 책장을 덮으며 경민에게 말을 건넸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동시성'에 관한 이야기 있잖아요. 현재의 선택이 과거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그 말... 사실 전 그 말을 믿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작년 여름,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어요."

경민은 가만히 수연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전 아주 오랫동안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죠. 어쩌면 내가 지금 이 문을 여는 행위가, 18년 전 겁에 질려 있던 어린 나를 구원할 수도 있겠다고요."

​수연이 경민을 향해 미소 지었다. ​경민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사무실 구석에서 외롭게 써 내려갔던 문장들이 가진 의미가 눈앞에서 증명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카페 안쪽에서 마이크를 테스트하는 짧은 하울링 소리가 들렸다. 오늘 모임을 주최한 사회자가 밝은 목소리로 시작을 알렸다.

​"자, 다들 오셨나요? 이제 '박경민 작가님과 함께하는 양자역학 독서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저자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는데요..."

​수연의 눈이 크게 써졌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그리고 그가 펴 바르던 라일락 향 핸드크림을, 다시 그의 손 아래 놓인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황한 듯 살짝 붉어진 그녀의 뺨 위로 겨울 햇살이 더 깊게 스며들었다.

경민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향해 작게 목례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박경민입니다. 사실 제가 그 문장을 쓸 때, 누군가 수연 씨처럼 대답해 주길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요."

​수연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테이블을 건너 경민의 가슴에 닿은 후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속았네요. 작가님 앞에서 너무 제 속마음을 다 보여드린 것 같아요."

​"덕분에 제 문장들이 비로소 완성됐습니다. 반갑습니다, 수연 씨."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북카페 안으로 쏟아지는 노란 햇살이 두 사람을 동시에 감쌌다. 2년 전 경민의 고민과, 작년 여름 수연의 용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만남이 하나의 선으로 얽히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끝.




추신,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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