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픈건 딱 질색이니까 - 바람이 분다(이소라)
2. 바람이 분다
16일 오전
아침 뉴스에서 오늘 비 소식이 있더니,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테헤란로를 가로지르는 빗줄기는 사무실의 커다란 유리창 위로 점점이 번졌고,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거리엔 급하게 우산을 펼친 사람들의 움직임이 잰걸음으로 얽혔다. 미연은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전 내내 핸드폰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고객들이 하는 말은 모두 조건과 기준에 관한 이야기였다.
A는 최근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과 몇 번 연락을 주고받다 흐지부지되었다고 했다. 그는 진심을 다해 잘해보려 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았으나 관계가 원하는 대로 발전하지 않자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만의 추측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온 듯했다. 그는 자신의 답답함을 미연에게 그대로 쏟아냈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요?", "그분도 사실은 관심 있었던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저 말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난 건가요? 저 정도면 회사도 괜찮고, 연봉도 나쁘지 않아요. 키도 평균 이상이고, 다들 왜 이러는 걸까요?”, “사람을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말끝마다 자신을 자책하다가도, 어느 순간엔 여성의 태도를 분석하며 불쾌함을 토로했다.
조용하고 점잖았지만, 눌린 감정처럼 오래 쌓여 있는 억울함이었다.
미연은 조심스레 공감의 말을 건네며 그의 말을 받아냈지만, 머릿속에는 며칠 전 여성 회원과 나눈 통화 내용이 생생히 떠올랐다.
“초반엔 나쁘지 않았어요. 근데 하루에 몇 번씩 연락이 오니까 숨이 막히더라고요. 너무 손해만 따지는 모습도 싫고. 그냥 너무 성급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피하게 되네요.”
여성 회원의 말투는 조심스러웠지만 단호했고, 이미 미연은 양쪽의 감정선이 어긋났다는 것을 직감했었다. 그래서 A에게 소개팅 직후 바로 후속 만남을 권하지 않았던 건데...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진실을 다 말해줄 수 없다. ‘그분이 불편해하셨다’는 말을 그대로 전할 수도, '회원님께선 좀 급했던 것 같다’는 솔직한 조언도 쉽게 건넬 수 없다. 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상대의 마음에 기름을 붓지도, 물을 들이붓지도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처음 만남에서는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게 참 어렵죠. 회원님이 너무 애쓴 건 잘 알겠어요. 근데 상대가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여지를 두는 것도 때론 필요하거든요. 너무 잘하려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최대한 중립적인 말들로 상황을 정리했다.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는 똑같은 질문을 누군가에게 받게 되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맞아떨어졌다.
또 다른 회원 B는 30대 중반의 여성 회원으로, 며칠 전 소개팅 상대가 약속에 10분 늦었다는 이유로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기본이 안 된 사람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약속은 약속 아닙니까? 첫 만남부터 늦는 사람은 예의가 없는 겁니다.”
“제가 돈을 낸 이유가 이런 수준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말끝마다 억누른 분노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미연은 속으로 ‘남자가 그날 직전까지 회의를 하고 왔다고 했잖아…’라고 떠올렸지만, 굳이 해명을 덧붙인다 해서 그녀의 감정이 풀릴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불편하셨을 것 같아요, 충분히 이해됩니다.”
미연은 최대한 부드럽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응대했지만, 계속되는 짜증과 억울함의 반복 속에서 스스로가 점점 공허해지는 걸 느꼈다.
그 회원의 불평은 끊기지 않고 되풀이됐다.
사실 통화 중간쯤엔 미연의 머릿속은 거의 멍해져 있었다. 몇 년 전에도 이런 유형의 고객을 응대하다가 너무 감정이 상해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원님."
말끝에는 눅눅한 침묵이 입안에 오래 머물렀다.
전화를 끊자, 빗소리만 들렸다.
‘고객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불안을 받아내는 사람인 걸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유리창을 바라보자, 그곳에 비친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오늘따라, 그 미소가 조금 얇게 느껴졌다.
책상 위에는 이미 차갑게 식은 라떼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16일 점심.
미연은 자리에 앉은 채 차갑게 식어버린 라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전 내내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이미 체력도, 감정도 바닥나 있었지만, 점심시간을 활용한 신규 회원과의 미팅은 피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한숨을 삼키고, 필요한 서류와 노트, 그리고 작은 우산을 챙겨 건물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오전의 소나기가 남긴 도로 곳곳의 웅덩이들이 서울 도심을 조각조각 쪼개어 반사하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구름이 걷힌 채 맑고 파란빛을 드러냈고, 그 빛은 투명한 햇살이 되어 가로수의 잎사귀와 주차된 차, 고층 빌딩의 유리창에 반사되며 비 온 뒤 특유의 화창한 거리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맞은 거리는 회사원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며 자유로운 점심시간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걷고 있었지만, 미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갔다. 활기 넘치는 발걸음과 가벼운 농담들이 뒤섞인 공간 속에서, 그녀의 걸음만은 마치 다른 시간대를 걷는 사람 같았다.
삼성타운 맞은편, 브런치 카페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익숙한 커피 향이 부드럽게 코끝을 스쳤다. 그녀는 카운터에 들르지 않고 곧장 2층 창가 쪽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해 둔 자리에는 햇빛이 유리창을 타고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고, 그 채광 덕분에 공간 전체가 한결 차분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미연은 커피 대신 뜨거운 티 한 잔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아 가방을 정리하고 노트를 꺼내며 짧은 숨을 골랐다. 오전 내내 이어진 고객 응대로 평정심이 다소 흔들리긴 했지만, 이렇게 잠시라도 사무실 밖에서 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알아챘다.
Bill Evans의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비 오는 밤이면, 혼자서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곡이었다. 익숙한 멜로디가, 이 봄날의 따스함 속에서 어쩐지 조금은 낯설게 마음에 닿았다. 미연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카페의 문이 열리고, 곧 미연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화이트 셔츠에 차콜 그레이 슬랙스, 부드러운 컬로 단정하게 손질된 머리. 단순하지만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였다. 그는 주변을 잠깐 둘러보다가 미연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연 매니저님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에는 예의와 약간의 긴장이 묻어 있었다.
“네, 반갑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미연은 부드러운 미소로 자리를 권했다. 남자가 자리에 앉자마자, 카페 직원이 그가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잠깐의 정적이 둘 사이의 공간을 채웠다. 그녀는 노트를 열어 상대의 기본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자연스러운 말투로 질문을 건넸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네, 뭐 늘 그렇죠. 회사랑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는지는 몰랐네요.”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뒤, 남자는 자기소개와 간단한 배경을 이야기했다. 재무팀에서 일하고 있다는 그는 차분한 말투로 가족과 직장, 그리고 결혼에 대한 생각을 풀어냈다. 말의 속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 그 안엔 자주 멈칫하는 숨 고르기가 있었다.
미연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짧게 숨을 고르는 순간, 그가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오늘은 고객님의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확인하는 정도니까요.”
“사실 저는… 저보다 자격이 낮은 분을 만나고 싶어요.”
그녀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 찻잔 위의 김이 희미하게 일었다가 사라졌다.
미연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레 되물었다.
“자격이 낮다는 건, 어떤 기준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중립적인 어조였지만, 마음속엔 가느다란 파장이 일기 시작했다.
‘자격’
그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남자는 잠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제가 리드할 수 있는 관계가 좋다는 의미예요. 예전 연애에선 계속… 시험받는 기분이었거든요. 자격이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상대가 저에게 계속 새로운 기준을 부여했고, 그걸 만족시키지 못하면…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느낌이 들게 하더라고요.”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말끝마다 묻어나는 조심스러움은 오히려 그의 진심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연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을 열기보단 생각이 앞서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연애담이 아니었다. 긴 시간 마음속에 눌려 있던 감정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남자는 조용히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손끝이 컵 가장자리를 몇 번이고 맴돌았다.
“마음이… 힘드셨던 일이 있으셨나 봐요.”
미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는 작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커피의 씁쓸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리고 미연은 그 쓴맛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좋아했어요. 많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의 감정을 유지하려면 계속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느낌. 상대에게 부족한 존재로 남지 않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해내야 했어요. 시간이 갈수록, 제가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었죠.”
그는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은 미연이 아닌 창밖 어딘가에 머물렀다. 말끝에 힘을 주지 않았고, 어떤 원망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남아있던 씁쓸함을 슬며시 꺼내놓은 사람만이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 연애는요…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지치게 해요. 어쩌면 사랑이었을 감정이, 마음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꾸 쥐어짜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남는 건, 다 짜내고 난 후의 공허함이었고요.”
그 말에 미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방금 들은 말들이,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가슴속 어딘가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느낌.’
‘쥐어짜게 되는 관계.’
그건 한때, 자신이 누군가에게 부여했던 사랑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오래된 기억들을 끌어올렸다.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문득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그녀 마음 어딘가에도 텅 빈 풍경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