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픈건 딱 질색이니까 - 그게아니고(10cm)
3. 그게 아니고
남자의 말이 멈춰 있던 기억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느낌.’
그 말이 미연 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을 냈다.
그리고 그 틈으로, 오래전 묻어두었던 K와의 기억들이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K는 미연이 대학생이던 시절, 늘 곁에 머물던 후배였다.
같은 동아리, 같은 캠퍼스, 그리고 비슷한 시간에 학교를 드나들던 남자.
키가 크고 말이 적었던 그는, 특유의 느린 말투로 미연을 편안하게 했다. 미연이 심하게 놀려도, 그는 언제나 웃으며 느릿하게 받아냈다.
신입생 때부터 K는 꾸준히 미연에게 호감을 표현해 왔다. 하지만 그가 미연에게 주는 감정은 편안함이지, 사랑은 아니었다.
‘좋은 동생’—그 정도였다.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마음이 ‘넘어가는’ 지점까지 닿지 못했다.
그는 몇 년을 그렇게 미연 곁에 맴돌았다. 축제 때면 함께 벽화를 그렸고, 시험 기간엔 도서관 구석자리에서 함께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라떼를 사다 주고, 빵을 건네고, 아플 땐 약국에 다녀오곤 했다. 그의 방식은 늘 다정했지만 조용했고, 꾸준했지만 서툴렀다.
미연은 그 마음을 때로는 장난으로, 때로는 그저 '착하네'라는 애매한 감사 인사로 받아넘기곤 했다.
받아들이지도, 밀어내지도 않은 채로.
K가 미연을 바라보는 동안, 미연에게는 몇 번의 연애와 헤어짐이 있기도 했다.
상대는 대체로 또래보다 능력이 앞서 있거나, 말투와 태도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겉모습이 세련되진 않았지만, 말수가 적은 대신 중심이 느껴지는 사람.
주도적이면서도 단단한 기색이 엿보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창업 동아리에서 직접 앱을 기획하고 외부 공모전에서 수상까지 했던 공대생이었고, 누군가는 조모임에서 늘 리더를 맡아 흐름을 주도하던 경영학과 선배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확실한 취향과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고, 미연은 그런 주도적인 남자들에 자주 끌렸다.
K도 그들을 알고 있었다.
미연과의 대화에서, 혹은 우연히 마주친 자리에서 그들을 보았으므로.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손에 든 채, 조용히 그녀 곁을 지켰다.
미연이 졸업을 앞두고 연애마저 접은 채 바쁘게 취업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도서관 앞 벤치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 K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 요즘 토익 점수 몇 나와요?”
“어휴, 나 이제 토익 안 봐도 돼. 넌 공부 잘 돼?”
K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점수가 600 정도는 나오는데… 쉽지 않네요. 막막하고.”
그 말에 미연은 잠깐 멈칫했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웃고 넘길 수 있었지만, 그 순간엔 이상하게도 마음 어딘가가 작게 흔들렸다. 졸업을 하게 되면, 이제 더 이상 그가 자신 곁에 머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게 느껴졌다.
‘좋은 후배야.’ 늘 그렇게 말해왔지만, 사실은—
‘고마워. 하지만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맞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애매한 감정이었다.
마음을 열어주지도, 완전히 떠나게 하지도 못한 채 그녀는 결국 그 감정을 장난처럼 포장해 건넸다.
“그럼, 700점 넘기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말은 농담처럼 흘러나왔지만, 그 속엔 분명한 마음이 섞여 있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니? 널 위해서든, 아니면... 날 위해서든.’
‘안 된다면, 그냥 여기까지인 거고.’
K는 놀란 듯 잠시 미연을 바라보다가, 곧 다시 웃었다.
“진짜예요? 말 바꾸면 안 돼요.”
“응. 안 바꿔. 700점 넘기면… 약속할게.”
미연은 자신이 내건 조건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시험이었다.
사랑의 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재는 시험.
그녀의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K는 정말로 토익 시험에서 700점을 넘겼다.
정확히는 745점.
결과가 발표되던 날, 그는 어김없이 미연을 찾아와 조심스럽게 성적표를 내밀었다. 장난처럼 던진 약속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넘겼어요. 그러니까… 내 소원 하나 말해도 되죠?”
미연은 성적표를 건네받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순간 가슴 어딘가가 울렁였지만, 그 감정이 설렘인지 불편함인지, 그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키스해 줘요.”
작은 목소리였다. 그의 두 손은 무릎 위에서 살짝 떨리고 있었다.
미연은 한순간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엔 여느 때와 다른 단단함이 있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순간에 대한 조심스러운 기대.
그 순간, 미연은 그가 대견했다.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이건 더 이상 장난처럼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낸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냥 웃어넘긴다면… 그건 비겁한 일이야.’
그래서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잠시 눈을 내리깐 채,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학교 뒤편 느티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입술을 맞추었다.
짧고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하지만 입술이 닿는 순간, 방금 전 느꼈던 묵직함은 더 선명한 감정이 되어 그녀를 덮쳤다. 분명 따뜻한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막연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의 소원을 거절하지 못한 건, 그가 자신을 위해 이뤄낸 성취를 외면할 수 없다는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었고,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지지 않는 자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당연하게 그날 이후에도 둘은 연인이 되지 못했다.
K는 분명 더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자주 연락했고, 그녀의 마음이 그를 향하기를 바라며 늘 기다려주었다.
그렇지만 미연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손을 잡는 일도, 데이트를 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좋은 후배야’, ‘아직은 아닌 것 같아’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한 발짝 거리를 두었다.
아니,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부족해.’
그녀는 몰랐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이 그에게 또 다른 시험지를 건네고 있다는 걸.
졸업 후 미연은 작은 광고 대행사에 취직했다.
회식, 보고서, 야근…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일에 적응해 가는 동안, 그녀는 조금씩 K와의 연락을 줄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물었다.
“요즘은… 많이 멀어진 것 같아요? 내가 정말 아무도 아닌 건가요?”
미연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지금은 내 생활이 너무 버겁기도 하고...”
그 말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K가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을 만큼의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착하고,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부족했다.
사회적으로, 혹은 삶의 속도로.
그리고 그런 생각의 이면엔,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안이 조용히 깔려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는, 아직 안 되는 거야.’
미연은 자신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이유로 자꾸만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건 그가 싫어져서도, 다른 사람이 생겨서도 아니었다. 다만 주저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애쓰는 사람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정작 이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불안이 조용히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움은 분명 느껴졌지만,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언젠가 큰 후회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만이 남았다.
그래서 그녀는 끝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를 붙잡지도, 놓아주지도 못한 채로 마음속의 문 하나를 조용히 닫아두었다.
그리고 그 문은 닫힌 채였다.
아주 사소한 일 하나가, 훗날 그 문을 건드리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