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말고 while (0&1)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 소원(어반자카파)

by 박경민


Prelude

0. 프롤로그 - 재즈 카페


‘Slow Bar – Sienna.’

시에나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는 이곳에서 오래도록 머문다.

마치 선반 위에 놓인 위스키처럼…


조용한 재즈의 선율이 연기처럼 번져 공간을 채운다.

낮은 조도의 노란 빛이 달빛처럼 테이블 위로 스며들고, 잔잔한 조명 아래 서 있는 유리잔의 굴곡은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바 벽면을 따라 늘어선 술병들은 그 은은한 빛을 머금은 채로 고요를 한 모금씩 숙성시킨다.

누군가는 그것을 ‘분위기’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공기’라 하겠지만, 시에나 바 안에서는 그것이 곧 ‘시간’이다. 바깥의 분주한 초침들은 문턱에서 멈추고, 이곳에서의 시간은 술잔 속에 가라앉거나 음악 속으로 천천히 녹아든다.

그래서일까.

이곳에 들어설 때는 낯선 얼굴을 한 이들도, 잔을 비우고 나갈 때는 부드러워진 표정을 짓는다. 소중한 친구와 아주 오래도록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는 사람처럼.

조명이 모든 걸 드러내지 않듯, 사람들도 여기서는 전부를 말하지 않는다.

결국은 말하지 않은 것들이 더 오래 남게 되니까.

잔잔한 빛, 나무의 향, 잔 위에 맺힌 물방울의 고요함.

그 모든 것들이 아무 말 없이 감정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머문다.

천장에 낮게 걸린 전등 또한 침묵으로 이곳의 시간을 견뎌낸다. 자리를 지키는 이에게만은 따뜻한 빛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 빛 아래에서는 웃는 얼굴도, 울음을 삼킨 입술도 오래도록 침묵하며 머물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이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해야 할 말을 굳이 고르지 않는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술이 대신 말을 건네주길 바라는 듯, 그저 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누군가의 이야기가 소리 없이 시간 위에 쌓여갈 것이다.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잔을 비우고, 고백하는 대신 눈을 감고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이야기.

여기서는 시간도, 그리고 마음도 위스키처럼 천천히 숙성된다.


바텐더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술을 따를 뿐, 말은 섞지 않는다.

몇 해째 이곳을 지켜왔지만, 손님의 이야기에 대해 말은 얹어본 적은 없다.

대신 그들의 손 끝이 남기는 작은 흔적들을 읽는다.

술잔을 들어 올리는 속도, 다시 채워지길 바라는 손짓, 잔을 내려놓는 손끝의 무게.

그 작은 움직임들이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첫 잔의 선택, 흔들리는 눈빛과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의 길이에서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쯤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를테면 ‘언어 없는 대화자’다.

손님이 어떤 생각을 하며 바에 앉아있는지, 잔의 흔들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잔을 굴렸고, 누군가는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웠다.

또 누군가는 마지막 한 모금을 테이블 위에 남겨둔 채로 떠났다.

바텐더는 그 잔들을 기억한다.

웃음을 남긴 얼굴보다, 잔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마음이 더 오래 남았다.

며칠 전에도 그런 잔 하나가 남아 있었다.

끝자리에 앉은 남자는 혼자였고, 아주 조용했다.

가끔 책을 들여다보았고, 위스키를 마시는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잔에선 유리잔을 바라보는 시선이 유난히 길었다.

바텐더는 그 남자의 마음이 잠잠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말을 삼켰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잔이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그는 Miles Davis의 <Blue in Green>을 슬며시 플레이리스트에 얹었다.


지금도 그는 그날 밤을 기억한다.

한 모금이 천천히 식어가던 시간.

책장을 넘기던 손.

고개를 들지 않던 시선.

손님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잔 속에 남겨진 위스키는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은 잔 속에 남은 말처럼, 한참 동안이나 머물렀다.

그리고 오늘 밤에도,

바텐더는 바 구석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잔이 남길 이야기를

그저 조용히, 그러나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Act I ―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

1. 어떤 하루


5월 16일.

그녀에게 오늘은 유난히도 지친 하루였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커플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미연에게 5월은, 12월 다음으로 바쁜 달이다.

'5월의 신부'가 많은 탓인지, 아니면 5월의 날씨나 계절의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 항상 이맘때면 신규 고객이 늘고 기존 회원들의 만남 요청도 부쩍 많아진다.

(신부가 많다면 당연하게도 신랑 역시 많겠지만, '5월의 신랑'이란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히 오늘도 아침부터 쉴 틈 없이 전화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오전엔 불만을 토로하는 회원들의 상담 전화들을 소화했고, 점심엔 식사도 건너뛴 채 개별 상담을 처리하느라 자리에 앉을 틈조차 없었다. 오후엔 이번 주 진행된 소개팅들에 대한 고객들의 피드백을 확인했고, 마지막엔 클레임이 접수된 미팅 후기를 정리해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하루 종일 미소 짓고, 공감하고, 중재하고, 위로하는 일로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냈지만 일과가 끝났을 때 느껴지는 이 기분, 그녀 안에 무언가가 소진되어 버린 듯한 지침과 겉으로 표현되지 못한 불쾌함은 그런 일상적인 업무의 과다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16일 아침

미연은 알람을 세 번이나 미룬 끝에야 겨우 눈을 떴다. 밤새 뒤척였던 탓일까. 머리는 멍했고, 눈꺼풀엔 묵직한 피로가 달라붙어 있었다.

‘오늘이 목요일이었지?’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신을 다잡듯 이불을 걷어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까지만, 일단 버티면 돼.'

짧은 다짐을 내뱉듯 중얼거리고는 서둘러 씻고 나와 거울 앞에 섰다. 오피스텔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큰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의 하얀 피부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 햇살이 만들어내는 자신의 얼굴빛을 바라보며, 거울 속 자신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거울 속 얼굴은 단정했다. 그런데 그 단정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눌렀다.

‘괜찮아 보여야 하니까.’

그녀는 손을 뻗어 밝은 톤의 베이스를 들고 피부를 정리했다. 이어 코랄빛 블러셔로 양 볼에 은은한 생기를 더한 후 입술엔 말간 핑크 립을 덧발라 화장을 마무리했다. 또렷한 쌍꺼풀 라인과 긴 속눈썹, 그 위로 가지런히 정리된 눈썹라인이 그녀의 인상을 한층 단정하고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긴 생머리는 잘 빗어서 깔끔하게 정리한 후 낮게 묶은 포니테일로 연출하고,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매무새를 다듬었다. 미연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눈가의 결을 정리하곤 몸을 돌려 옷장을 향했다.

'어떤 옷이 좋을까?'

반대쪽 벽에 빌트인 되어있는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큰 고민이 필요치 않은 단정한 오피스 룩 몇 벌과 액세서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은 아이보리빛 실크 블라우스에 매끈한 소재의 검정 하이웨스트 스커트를 매치하기로 했다. 얇고 흐르는 듯한 소재의 V넥 블라우스는 쇄골과 목선을 자연스럽게 드러냈고, 하이웨이스트 스커트는 그녀의 곧고 균형 잡힌 체형을 더 슬림하게 연출해 주었다.

그녀는 스커트의 단추를 채우고 다시 옷장 안쪽의 액세서리 트레이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손에 든 것은 얇은 프레임의 금테 안경이었다. 시력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업무 중엔 항상 안경을 썼다. 이미지를 보다 또렷하고 차분하게 만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단 상대방에게 자신의 눈빛을 곧장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더 컸다.

손목시계는 론진의 ‘돌체비타’ 라인을 골랐다. 슬림한 직사각형 시계는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출근 룩에 은근한 세련미를 더해주는 역할이었다.

여기에 베이지색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광택 없는 블랙 펌프스를 신은 뒤, 집을 나서기 직전 마지막으로 현관 앞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그녀는 립 컬러를 정돈하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녀의 출근 룩은 단정하고 세련됐지만, 때때로 차가운 인상을 남기곤 했다.

그녀는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굳이 바꾸려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편이, 오히려 편했다.


지하철을 타고 약 30분 거리.

그녀는 오늘도 같은 칸, 늘 서는 자리 근처에 섰다. 좌석은 이미 가득 차 있었고, 손잡이를 쥔 사람들은 대체로 무표정하거나 피곤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어두운 터널이 흘러가고, 차창에는 스쳐가는 불빛과 함께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그녀는 창에 비친 자신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화장은 깔끔했지만, 그건 마음속 어딘가에 남은 미세한 균열을 가리기 위한 얇은 막일지도 몰랐다.

회사 앞 사거리는 이미 출근하는 사람들과 차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신호음,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 거북이처럼 기어가고 있는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 그 모든 소음이 얽힌 거리 풍경은 늘 그렇듯 어딘가 조밀하게 막힌 듯한 답답함을 안겼다.

그녀는 익숙한 듯 그 소음을 피해 건물 1층의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지하철에서 미리 라떼를 주문해 두었기에,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픽업 선반 위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라떼를 집어든 그녀는 손끝으로 컵 홀더를 눌러 온도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머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의 라떼가 입 안을 채우고는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가 위장을 따뜻하게 자극했다.

'이제 좀 살겠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듯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작은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라떼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에 위치한 사무실로 향했다.

따뜻함은 여전히 손끝에 남아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복도를 지나며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라떼와 소지품을 책상 위에 올려놓던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와주실래요?"

지점장이었다.

미연은 짧게 숨을 고르며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을 새도 없었다. 지점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자연스러웠지만 살짝 굳어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서자 지점장은 곧장 말을 꺼냈다.
"어제 전소연 고객님 만나서 상담하셨다고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점장이 손에 쥔 볼펜을 굴리며 덧붙였다.

“요즘 고객들은 조건이 명확한 사람을 더 선호하니까, 감정적인 접근은 조금 줄이는 게 좋아요.”

미연이 고개를 들었다.

“감정적인 접근이요?”

“예, 고객이 원하는 건 정확한 조건이니까요.”

미연은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지만,그녀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네. 알겠습니다.”

입안에 남은 단어가 유난히 씁쓸했다.

‘감정적인 접근’

감정이란 말이, 마치 불필요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전소연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고객은 첫인상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깔끔한 외모에 또렷한 말투, 자신감 넘치는 태도까지. 하지만 예쁜 얼굴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그리고 상담이 이어질수록 묘한 아쉬움, 아니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 슬며시 피어났다. 거기에 학력이나 직업, 집안 배경 등 다른 조건들도 VIP 회원으로 분류하기엔 다소 애매했다.

상담이 끝날 무렵, 그녀는 '더 많은 가입비를 내도 좋으니 VVIP급 회원을 만나게 해 달라'고 미연에게 말했는데, 말투는 부탁이라기보단 지시에 가까웠다.

지점장이 말을 이었다.

"어제 상담 중에 좀 서운하셨던 모양이에요. 매니저님이 본인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미연은 짧게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대신 지점장에게 간단히 사과하고 '다시 연락해 보겠다.'는 말만 남긴 채 돌아섰다.

자리에 돌아와 라떼를 들었다. 처음 받았을 때의 뜨거움은 이제 없었다. 컵을 들어 한 모금 머금으니, 역시나 부드럽고 포근했던 그 감촉이 절반쯤 사라져 있는 듯했다.

그녀는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고 책상 위를 정리하면서 어제의 상담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었다.

전소연 고객은 분명 ‘조건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연봉, 학벌, 키, 가족관계, 출신지역, 자동차 그리고 종교까지.' 정확히 일곱 개.

그녀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남성을 찾으려면, 회사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기적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연은 그녀에게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었는데...

그럼에도 상담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다는 건, 결국 원하는 조건을 ‘확실히’ 관철시키기 위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미연은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몇몇 남성 회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건은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소개에 신중해지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조건'이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미연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식어가는 라떼를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그녀의 입안에서도 따뜻함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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