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현자들이 말하던 말—사랑하는 사람과 더 깊이 소통하기 위해서, 오히려 관계로부터 잠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그 말의 의미를.
그때의 나는 사랑에 빠지면, 누군가에게 마음이 향하면, 그 순간부터 내 시간 전체가 그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함께 있는 시간은 물론,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도 온통 그 사람의 잔상으로 물들어야 진짜 사랑이라 여겼다. 그 모든 감정이야말로, 사랑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온전하고도 값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거듭될수록, 나는 점점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마주했다. 감정은 짙어졌지만 이성의 끈은 손에서 미끄러졌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잃은 나를 발견할 때면, 사랑이라는 것이 어쩌면 나를 파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너무나 행복해서, 오히려 너무나 힘들었다.
아마도 도파민과 같은 강력한 호르몬의 작용이겠지. 그 감정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나를 잠식하는 양가적 감정으로 다가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다가도, 그래도 그 순간의 사랑은 진심이었다고, 내 의도는 순수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안위를 구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그 감정들을 돌아보면 문득 이런 질문이 스친다.
‘그 순간, 조금 더 이성과 감정 사이의 균형을 지킬 수는 없었을까?’
나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시도해왔다. 그리고 요즘,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는 일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잘 소통하고,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 그렇게 떨어져 나와야만, 다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모순 속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삶의 모든 지혜는 ‘중용(中庸)’으로 수렴된다. 극단이 아닌, 조화의 길.
그리고 그 조화를 실현하기 위한 가장 실질적인 방법은 ‘루틴’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아침이면 나는 고요한 고독 속에서 나와 마주 앉는다. 성장의 시간, 성찰의 시간, 그리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질문의 시간. 그렇게 나와 충분히 대화한 후에야 비로소 누군가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내 마음이 안정되고 평온해졌을 때, 그와 나누는 대화와 사랑은 훨씬 더 따뜻하고도 안정적이다.
그 감정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바로 그것이었다. 격정에 휩쓸리지 않는, 그러나 결코 메마르지 않은 감정. 편안하고 안정적인 사랑의 형태.
그것이 상대방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성숙 덕분인지, 혹은 그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찾아낸 내 방식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지금 그 길 위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엔 막연히 갈망했었다. 감정의 폭풍 없이도 사랑할 수는 없을까?
상처를 남기지 않으면서도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는 없을까?
그런 사랑은 너무도 멀게 느껴졌고, 어쩌면 불가능한 이상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랑이란, 내 안의 평온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리고 그 평온이란, 나와의 관계가 충분히 정립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편안하고 안정적인 사랑 속에서 함께하는 시간이란, 단지 감정의 쾌락이 아닌—서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용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그 길의 입구에 서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고요한 연못 앞에서,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너와 함께 서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https://medium.com/@irenekim1b/a-quiet-pond-called-love-f9f4aa41098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