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목소리에 기대어 『자기만의 방』을 완독 하기로 한 날
나는 요즘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오늘은 작은 독립서점에 갔다.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우하고 있던 책방 공지글에, 책값만 내면 참여할 수 있는 세계 여성의 날 기념 낭독 모임 안내가 올라와 신청해 둔 터였다. 1층은 서점이고, 2층은 책 읽는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 아늑한 곳이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가 책상을 하나로 붙인 뒤 둥글게 둘러앉았다. 책방지기를 포함해 모인 사람은 모두 여섯 명. 자리에 앉자 책방지기가 책을 한 권씩 나눠주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었다.
누군가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조금 느린 속도로.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다’기보다 ‘듣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혼자 책을 읽을 때는 눈으로 문장을 훑어 지나가기 쉽지만, 누군가의 목소리로 읽히는 문장은 쉽게 지나갈 수 없었다. 문장 하나가 방 안에 잠시 머물렀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한 시간 읽고, 10분을 쉬고, 다시 한 시간 읽는 일정이었다. 우리 여섯 명은 한쪽씩 번갈아 가며 소리 내어 읽었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또 어떤 사람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같은 문장도 목소리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1장을 읽을 때는 활자가 귓가에 맴돌 뿐, 무슨 말인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백 년 전 여자 대학교에서 했던 강연이라는데, 번역의 장벽 탓인지 문장들이 꽤 견고하고 까다로웠다. ‘나만 이렇게 이해력이 부족한가.’ 내심 주눅이 들 즈음 10분간의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감상을 나누다 보니 웬걸,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다들 미궁 속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묘한 안도감과 연대감이 서점 안을 채웠다.
다시 시작된 두 번째 한 시간. 2장에 접어들자 버지니아 울프가 숙모에게 상속받은 ‘돈의 쓸모’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이어졌다. 그제야 오늘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는 것도,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함께 낭독하고 있다는 사실도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이미 널리 알려진 문장이지만, 누군가의 목소리로 직접 들으니 훨씬 뼈저린 현실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오롯한 내 몫의 방이 없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일상을 버텨내며 글을 쓰려는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겹쳐 보였다.
원래 이 모임은 두 시간 낭독으로 끝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한 번 더 연장되었다. 남은 페이지를 도무지 혼자서 완독 할 자신이 없다는 데 참가자 전원이 이심전심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혼자였다면 첫 장에서 조용히 덮어버렸을 어려운 책도, 서로의 목소리에 기대면 기어코 끝까지 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함께하는 낭독의 힘일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서점을 나왔다. 책은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지만, 아까 읽었던 문장들은 이제 종이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지나 내 안에도 단단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다가올 다음 모임에서는 또 어떤 목소리들이 이 막막하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을 채워나갈지, 벌써부터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오늘 우리는 『자기만의 방』을 읽었다.
아니, 어쩌면 서로의 목소리를 끝까지 읽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여성의 날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울프 #낭독 #낭독모임 #독립서점 #독서모임 #고전 읽기 #연대 #에세이 #낭독의 쓸모 #허배우 #actorheo #러브앤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