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쪽 벽돌책을 무너뜨린 것은 목소리였다

『To Kill a Mockingbird』 원서 낭독기

by 허배우 actorheo

500쪽이 넘는 영어 소설을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있는가.


나에게 『To Kill a Mockingbird』의 원서는 그런 책이었다. 몇 번이나 앞장을 들추다 포기했던, 말 그대로 벽돌 같은 책.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벽돌을 조금씩 무너뜨린 것은 눈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트루먼 카포티의 삶을 다룬 영화 『Capote』를 보다가 문득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제목만 알고 있던 소설, 『To Kill a Mockingbird』였다.


이 작품의 작가 Harper Lee는 어린 시절부터 Truman Capote와 가까운 친구였고, 훗날 카포티가 르포르타주 소설 『In Cold Blood』를 취재할 때에도 그의 곁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소설 속 장난기 많은 소년 ‘딜’이 바로 카포티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나니, 막연히 멀게만 느껴졌던 이 책이 조금은 가까워진 듯했다.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읽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막상 펼쳐 든 원서는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500쪽이 넘는 영어 문장들은 단단한 벽돌처럼 느껴졌고, 몇 번이나 앞부분만 들추다 덮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책에 다가가 보기로 했다. 번역본을 나침반 삼아 원서와 병행해 읽고, 여기에 오디오북을 더했다. 눈으로만 따라가던 활자가 목소리를 얻자 문장은 조금씩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우의 차분한 낭독을 귀로 들으며 그 리듬에 맞춰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 보니, 처음엔 막막하게만 보이던 페이지들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때로는 어린 스카웃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단단한 애티커스 핀치의 목소리를 빌려 문장을 읽기도 했다. 그렇게 입 밖으로 문장을 하나씩 내보내다 보니 어느새 나는 소설 속 메이콤 마을의 길 위에 서 있는 듯했다.


스마트폰 녹음 기능도 뜻밖의 조력자가 되었다. 원서를 낭독하며 녹음한 뒤 그 음성을 텍스트로 옮겨 보면, 내 발음과 문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다시 눈으로 돌아오는 이 작은 순환이 500쪽의 두께를 조금씩 견디게 해 주었다.


마지막 장에 가까워질 무렵, 나는 비로소 이 소설의 제목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 속에서 앵무새는 그저 노래할 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종 이유 없이 돌을 던진다. 그 돌의 이름은 대개 의심이거나, 때로는 편견이다.


낯선 언어를 더듬더듬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천천히 배워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때로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조금 더 천천히 들어야 한다는 것을.


기나긴 낭독의 여정을 끝내고 책을 덮었을 때, 내가 내 목소리로 읽어 내린 517쪽의 문장들이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Most people are, Scout, when you finally see them."

낯선 언어를 더듬더듬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나는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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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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