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대본집 1권, 매주 토요일 1시간 낭독으로 완독 하다
토요일 아침 6시 30분.
누군가에게는 아직 깊은 잠 속일 시간에, 우리는 〈나의 아저씨〉 대본집을 펼쳤다.
사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인생드라마라고 말할 때마다 언젠가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대본집부터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그렇게 시간만 조금 흘렀다.
그러다 올해 1월, 뜻이 맞은 지인들과 줌으로 함께 낭독을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이 작품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인 8명과 매주 토요일 아침 1시간씩 읽었고, 그렇게 10회를 채워 1권을 끝냈다. 지난주부터 2권에 들어갔다. 1시간 동안 평균 20장 정도 낭독할 수 있어서 앞으로 8회 더 하면 완독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낭독은 얼굴보다 목소리로 먼저 만나는 모임이다. 줌 화면은 켜지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목소리만 연결한 채 대사를 읽는다. 나는 의자 앞에 요가 매트를 깔고 앉곤 했다. 내 차례가 오면 대본을 읽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에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토요일 아침 6시 30분의 낭독은 그렇게 마음뿐 아니라 몸도 조금씩 깨우는 시간이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리더가 단톡방에 참석 여부를 묻고, 그 주의 인원수에 맞춰 배역을 나눈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맡을지는 사다리 타기로 정한다. 그렇게 정해진 역할을 들고 토요일 아침에 접속하면, 우리는 화면 없이도 이상하게 같은 장면 안에 들어가게 된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다시 읽는 마음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이 작품을 화면보다 먼저 문장과 목소리로 만났다. 이미지를 기억한 채 대사를 확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말의 결, 숨의 길이, 멈춤의 리듬으로 인물의 감정을 더듬어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더 오래 붙드는 문장들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말은 장면 없이도 선명했고, 어떤 침묵은 설명 없이도 깊었다. 〈나의 아저씨〉는 내게 ‘본 드라마’라기보다 먼저 ‘읽으며 들어간 이야기’가 되었다.
1권을 마무리하며 명대사를 골라봤다. 허배우가 뽑은 문장들은 이렇다.
172쪽.
동훈: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199쪽.
기훈: “내 말은, 내가 막사는 것 같아도 오늘 죽어도 쪽팔리지 않게! 매일매일 비싼 팬티 입고! 그렇게 비장하게 산다는 거야. … 그니까 형. 나 쪽팔려하지 마라. 형이 나 쪽팔려하면 나 진짜 슬프다.”
277쪽.
동훈: “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전달하지 마. 그냥 모른 척해… 내가 상처받은 거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냐.”
278쪽.
동훈: “겁나. 너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
유라: “마음이 꼭… 봄 같아요.”
319쪽.
유라: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저는 그랬던 거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였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이 동네도 망가진 거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 줘서…”
337쪽.
동훈: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아무것도 갖지 않은 인간이 돼보겠다고. 다들 평생을 뭘 가져보겠다고 고생고생하면서… ‘나는 어떤 인간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데… 뭘 갖는 건지도 모르겠고…”
359쪽.
동훈: “여기가 집이 아닌데… 자꾸 여기가 집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그래서 자꾸 여기로 오는 거야… 어떻게 하면 진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지 않고…”
정희: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이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면 〈나의 아저씨〉가 왜 오래 남는지 알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사람을 위로하면서도 쉽게 달래지 않는다. 상처를 알면서도 성급하게 봉합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의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수치심, 실패, 버팀, 망가짐,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아픈 것들을 이상할 만큼 담백한 문장으로 꺼내놓는다.
그중에서도 허배우가 뽑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319쪽, 유라의 대사이다.
이 관점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래 사랑받은 작품에는 오래된 해석들이 있고, 좋은 대사에는 늘 먼저 반응한 마음들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내게 319쪽의 유라의 대사는 〈나의 아저씨〉 1권 전체를 가장 정확하게 붙들어주는 문장이었다. 이 작품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되짚게 되는 감정은 ‘치유’보다 ‘안심’이었는데, 유라는 바로 그 안심이 어디서 오는지를 가장 조용하고 정확하게 말해준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이 문장은 너무 정확해서 아프다.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정말 무서운 건 실패 자체보다 망가진 내가 남에게 보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너진 상태, 금 간 마음, 예전 같지 않은 내 모습. 사람들은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버티고, 정리하고, 괜찮은 척하면서 산다.
그런데 유라는 아주 뜻밖의 고백을 한다.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이 대사가 특별한 이유는 망가짐을 낭만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망하면 더 단단해진다거나,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거나, 그런 익숙한 위로를 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가 망한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안심이 됐다고 말한다. 인생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것, 망가진 뒤에도 여전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건 드문 위로다. 보통 우리는 잘된 사람을 보며 희망을 얻는다. 다시 일어난 사람, 끝내 증명한 사람, 결국 복구해 낸 사람에게서 안심을 얻는다. 그런데 유라는 다르다. 망한 채로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서 안심을 얻는다. 그래서 이 대사는 〈나의 아저씨〉의 세계를 가장 깊이 설명하는 문장처럼 들린다.
이 드라마의 사람들은 다 어딘가 망가져 있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관계는 금이 갔고,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고, 일과 사랑과 돈은 제자리를 잃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완전히 끝난 얼굴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농담을 하고, 서로를 챙기고, 또 다음 날을 살아낸다. 완전하지 않은 채로도 삶은 계속된다. 〈나의 아저씨〉는 그걸 끝까지 보여주는 드라마다.
유라는 그 풍경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동네도 망가진 거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나는 이 문장이 참 좋다. 완벽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고, 찬란하게 빛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불행한 것도 아닌 상태. 무너진 자리에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만들어내는 어떤 평온. 〈나의 아저씨〉는 바로 그 얼굴들을 오래 바라보게 하는 드라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남는다.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 줘서…”
어쩌면 우리가 사람에게 기대하는 가장 깊은 역할도 이것인지 모른다. 나를 구원해 주는 사람,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 이전에, 내가 망가져도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조금 덜 두렵다.
토요일 아침 6시 30분에 모여 1시간씩 대본을 읽은 시간도 어쩌면 그런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보다 먼저 목소리를 알게 되었고, 화면 없이도 같은 장면을 함께 건넜다. 피곤한 날도 있었고, 마음이 무거운 날도 있었고, 그냥 버티듯 접속한 아침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동훈이 되고, 누군가는 기훈이 되고, 누군가는 유라가 되었다.
사다리 타기로 정해진 역할을 잠시 맡아 읽는 동안, 각자의 하루와 각자의 마음도 잠깐 그 인물들의 문장 속으로 들어갔다. 같은 대사를 읽고, 누군가가 고른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의 침묵을 함께 견디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좋은 문장은 내용을 이해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람을 안심시킨다. 319쪽의 유라의 대사는 바로 그런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단지 유라의 독백이 아니라, 어쩌면 〈나의 아저씨〉가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조용하고도 깊은 위로인지도 모른다.
망가져도 괜찮다.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러니 당신도 조금은 안심해도 된다.
우리는 그렇게 1권을 끝냈고, 이제 2권으로 들어갔다. 앞으로도 좋은 문장들은 계속 나오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대사를 쉽게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다.
토요일 아침의 낭독이 내게 남긴 건 단지 명대사를 골랐다는 기억이 아니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말 한 줄에 기대어 다음을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작품은 그 한 줄을 아주 오래 남게 만든다는 것. 319쪽 유라의 대사는, 내게 바로 그런 문장이 되었다.
[허배우의 밤 9시 낭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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