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미 대자연 속으로
우리는 미국 하면 어떤 풍경을 가장 먼저 떠올릴까. 뉴욕,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야경 아니면 그랜드캐년의 광활한 협곡 정도 되지 않을까. 나 역시 그러했으나 이제는 조금씩 몇 개의 그림들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미국에서 2년여 생활을 하며 느낀 점은 이 나라를 단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 물론 훨씬 더 넓은 땅을 가진 러시아 그리고 비슷한 크기의 캐나다, 중국도 있고 그들 지역의 다양성 또한 수만 가지일 게 분명하다. 그러나 오로지 미국만이 갖는 다양한 기후대(북극, 온대, 열대, 사막, 산악 기후 등), 주요 대양인 태평양과 대서양이 모두 접해있다는 점 그리고 육해공 교통망 편의성까지 고려할 때 미국은 지구상 그 어느 단일 국가에도 없는 지리 문화적 다이내믹스를 느낄 수 있다.
2년 전 시애틀에 오기 전 이곳은 나에게 그저 '잠 못 이루는' 도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이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꺼내 보았고, 그 영화에서 마저도 시애틀은 주요 무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마침내 비행기가 도시 상공을 배회하며 하강을 준비할 때 창밖으로 보이던 도시의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온통 초록 그리고 수많은 호수 그리고 우뚝 솟은 산 하나. 미국은 자유의 여신상이 전부라 생각하던 내게 눈앞의 시애틀은 그저 또 다른 나라, 또 다른 세상으로 다가왔다. 현지에서 통용되는 시애틀의 별칭은 에메랄드 시티(Emerald city), 시애틀이 속한 워싱턴주의 별칭은 에버그린 스테이트(Evergreen state)다.
미국 주요 대도시 공항들 중 상공에서 이처럼 초록으로 물든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거의 없다. 입장과 동시에 서북미 대자연에 매료된다. 우뚝 솟은 산 하나는 미본토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마운트 레이니어(Mount Rainier)다. 백두산 높이의 두 배 정도인데 실감 나지 않는다. 마치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의 후지산 마냥 삼각형으로 봉긋 솟아있고 상부에는 만년설이 조화롭다. 마운트 레이니어는 시애틀 다운타운에서도 한눈에 배경화면이 되어줄 정도로 도심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다운타운에서 잘 빠진 I-5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레이니어까지 2시간이면 족하고 당일치기 여행 역시 충분하다. 미국의 대자연이 그리 멀지 않다.
얼마쯤 달렸을까. 아파트보다 높은 침엽수들이 그야말로 촘촘히 들어찬 숲 속을 내달린다. 모바일 데이터 신호는 이미 꺼졌으니 새삼 오지에 들어섰음을 느낀다. 초행이라면 구글맵에서 지도를 미리 다운로드 받아가기를 추천한다. (유튜브 뮤직도 마찬가지) 숲 속으로 난 외길을 내달리다 보면 레이니어 직전에 크리스털 마운틴이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겨울 시즌 스키장으로 유명한데 산 정상에는 마운트 레이니어를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차로 거진 올라가서 주차를 한 뒤 인당 $50 정도 주면 곤돌라로 금세 전망대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제법 근사한 식당과 야외 펍, 아이들 놀이시설까지 갖추었다. 레이니어까지 가기에 시간이 부족하거나 진입이 어려울 때 이곳 크리스털 마운틴 전망대에 올라 소시지에 맥주를 곁들이면 이 또한 추억이 된다.
다시 산을 내려와 마운트 레이니어 국립공원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구불구불 오르막 길을 운전하다 보면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에 잠시 긴장이 된다. 그렇게 산 위로 살금살금 올라가다 보면 불현듯 창밖으로 어느새 백호 한 마리가 자태를 드러낸다. 타-다!
마운트 레이니어에는 크게 두 곳의 전망대가 있다. 남쪽의 파라다이스(Paradise)와 북쪽의 선라이즈(Sunrise). 같은 산에 있어도 보는 맛 걷는 맛이 매우 다르니 적어도 각 한 번씩 총 두 번은 다녀오시라 말씀드린다. 남쪽의 파라다이스 전망대는 레이니어 국립공원 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이다. 모두가 기대하는 타격감 있는 경치 덕분이다. 높은 산 중턱이라고 겁낼 필요 없다. 야트막한 언덕 두어 시간 가볍게 걷는 정도만으로도 대자연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남녀노소 모두 웰컴이고 강아지는 트레일 포함 야생 지역으로 진입이 불가하니 참고하시라. 트레일도 비교적 정돈이 잘 되어있다. 다만 편안한 운동화를 신는 게 좋고 바람막이 재킷을 걸치는 센스 정도는 필요하다.
탁 트인 대자연을 병풍 삼아 시리도록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정상을 바라볼 제면 저도 모르게 뱃속 깊은 호흡을 내쉬게 된다. 눈 녹은 물이 졸졸 흐르고 언덕 어딘가로 사슴 새끼들이 풀을 뜯고 있다. 표시판에 곰과 같은 야생동물들을 조심하라고 하나 알려진 트레일만 이용하고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겁낼 필요는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또 다른 북쪽의 전망대 선라이즈를 더 선호한다. 선라이즈는(해발 2천 미터) 파라다이스(1천6백 미터) 대비 더 높고 더 가파르다. 연중 방문 가능 시기는 6~8월로 파라다이스 5~10월 대비 더 제한적이다. 파라다이스 대비 적은 사람들만 수용하는 상대적 폐쇄성에서 신비감을 풍긴다. 좋은 곳은 알리고도 싶은 반면 나만 보고 싶은 양가적 감정이 들기 때문일까 마음속 깊이 간직한 레이니어의 풍경들은 모두 선라이즈 지역이다. 트레일을 걷다 보면 광활한 대자연 속 아기자기한 야생화가 유독 많이 눈에 띈다. 길가에서 차를 가로막고 선 다람쥣과 동물, 마멋을 보여준 곳도 선라이즈다.
레이니어는 미국 63개 국립공원 중 한 곳이며 앞서 소개한 전망대들 포함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가려면 입장권 또는 국립공원 패스가 필요하다. 검문소에서 직접 구매 가능하나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것이 심적으로 편안하다.(모바일 데이터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아울러 팬데믹 이후 몰려드는 입장객들을 분산시키기 위해 2024년 시즌부터는 Timed Entry Reservation이라 하는 별도 시간 예약이 필요하다. 사전에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2를 지불하고 비어있는 날짜와 시간 슬롯을 예약해야 하는데 7, 8월 주말 같이 인기 있는 시간대는 최소 1~2개월 전에 해야만 하니 부디 미리 준비하시라.(중복 예약 가능) 날씨 체크도 필수다. 시애틀 다운타운의 날씨가 맑다 하여 안심은 금물이다. 수시로 변하는 날씨와 구름 탓에 산 정상을 놓치기 일쑤다. 언젠가 한 번 안개와 빗속을 뚫고 들어가 보았는데 산은 없고 코앞에 나무만 있었다. 날씨가 아무리 쾌청하여도 구름 딱 한 조각이 산 꼭대기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 쉽게 허락하지 않는 자연의 완고함을 느끼며 다음을 기약할 뿐이다.
지역에 보물 같은 이 산이 최근 온난화 때문에 산 정상의 빙하가 조금씩 녹아 그 높이가 줄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 산 이름이 18세기말 영국의 해군장교 조지 밴쿠버라는 사람이(캐나다 밴쿠버 도시 이름의 유래가 되는 그 사람) 자신의 친구 피터 레이니어를 기리기 위해 붙였다고는 하는데, 최근 지역 원주민 사회에서 비판을 받고 '타호마(물의 어머니)'라는 원주민어로 산 이름을 바꾸자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지역 명물답게 높이나 이름이나 곧장 기사화가 되곤 한다. 같이 가는 사람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시라.
레이니어를 다녀오면 한 주간 속이 울렁거리고 심지어 심장이 쿵쾅거린다. 하얀 호랑이를 맞닥뜨리고 나면 같은 기분일까. 혹자는 이 산의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해 각 국의 여러 정치인들이 찾는다고도 한다. 집 앞의 작은 산도 좋지만 이토록 거대한 산을 다녀오고 나면 자연에 압도됨을 느끼며 다시금 삶에 겸손해진다. 산은 말하지 않지만 언제나 내게 조언을 건넨다.
‘아등바등 힘들지? 너무 애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