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서 만난 사람들 01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아침. 9시에 리스본으로 넘어가는 버스를 타야 해서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볼트를 이용해 택시를 불렀는데 출발 위치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미팅 포인트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돌길을 걸어야 했다. 분명 백미러로 나를 봤을 법 한 택시 아저씨는 한 치의 양보 없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순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애초에 위치를 잘못 설정한 내 실수였기에 할 말은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는 잠시 헤맸다. 버스를 타려면 한 층 위로 올라가야 했다. 겨우 9시 출발 버스를 찾은 뒤 짐칸에 캐리어를 실었다. 출발 시각까지는 10분 정도 남아있었다. 목이 말라 근처 자판기에서 물을 사려고 했는데, 카드도 현금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 건가? 고민하며 한참을 끙끙대고 있는데 바로 옆 자판기에 파란 체크셔츠를 입은 흑인 남성이 다가왔다.
힐끔 옆을 훔쳐보니 그도 자판기 사용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자판기 앞에 나란히 서서 1분가량 이것저것 눌러봤을까, 마침내 그가 물을 사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한 건지 물어보려던 찰나 그는 이어서 물을 하나 더 사더니 내게 건넸다. 생각지 못한 호의에 감동하며 1유로를 주려 했지만 그는 선물이라며 그냥 마시라고 했다. 아침부터 불친절한 택시 아저씨를 만나고 버스를 찾느라 지친 터라 그 작은 호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서로 여행 중이냐는 대화로 이어졌고, 그는 리스본에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새벽 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고.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리스본으로 떠난다고 말하며 내 버스를 가리키려는데, 저 멀리 버스가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9시가 안 됐는데? 화들짝 놀라 그 친구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버스를 향해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문을 두드려 버스를 세우고 기사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내가 버스를 착각해 다른 버스에 짐을 실어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예약한 버스는 flix 버스였는데, 캐리어를 실어둔 버스는 rede express였던 것. 같은 시각에 출발하는 두 개의 버스가 있었고, 당연히 9시 버스가 하나뿐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 착각이었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 기사 아저씨께 정말 미안한데 버스를 착각했다고, 그런데 이 버스에 내 짐이 실어져 있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겨우 캐리어를 챙겼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짐을 챙긴 후 뒤돌아 친구를 다시 찾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물을 사준 데에 대한 충분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그의 여행 계획도 궁금했고, 리스본에서 추천받을 만한 곳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캐리어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버스를 향해 뛰어가는 내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캐리어를 잃어버렸다면 꽤 재밌는 여행기가 됐을 테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버스를 탈 때 시간뿐만 아니라 회사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으며 리스본으로 향했다.
리스본에 도착해서는 호스텔에 짐을 맡겨두고 곧바로 나타를 먹으러 갔다. 맛이 있든 없든 2개는 먹어야 배고픔이 가실 것 같아서 2개를 먼저 주문해 봤는데 이게 웬 걸, 너무 맛있었다. 포르투 나타는 가짜였다. 리스본 나타가 진짜⋯. 단숨에 나타 2개를 해치운 뒤 바닷가에 가서 먹을 생각으로 추가로 나타를 주문했다. 2개입 1개를 주문했다고 생각했는데 소통의 오류였는지 2개입 2개가 나왔다.
방금 나타 2개를 해치웠는데 이제 내 손엔 새로운 나타 4개가 들려있었다. 당황했지만 순서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뒤에 둔 채 상황을 설명하고, 나타를 돌려주고, 환불을 받는 절차는 상상만 해도 번거로워서 그냥 4개를 받아 들고 바닷가로 향했다. 나타 4개? 오히려 좋아.
리스본의 바다는 무척이나 눈부셨다.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어 리스본의 상징인 노란색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포르투에서는 비둘기가 나를 반겨줬는데, 리스본에서는 갈매기가 내 앞에 와 앉았다. 포르투갈 새들은 전부 다 겁이 없나? 갈매기와 나란히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나타가 동이 났다. 2개만 샀다면 부족했겠다고 생각하며 호스텔 체크인을 위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호스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움직였던 탓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잠시 쉬기로 결정하고 침대에 누워 저녁으로 뭘 먹을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점심을 나타로 때워서 저녁은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마침 동행 카페에 저녁 동행을 구한다는 글이 올라와있길래 약속을 잡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2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근처 전망대를 구경한 뒤 약속 시간에 맞춰 식당에 도착했다. 곧이어 동행이 도착했고, 음식을 주문한 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대화하니 마음이 편했다.
동행한 오빠는 항해사였다. 항해사라는 직업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기에 너무 신기했다. 지금은 휴가 중이라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고, 보통 6개월 이상 항해를 하면 한 번 휴가를 받을 때 3개월 정도로 길게 받는다고 했다. (심지어 연봉까지 알려줬다.) 내가 너무 신기해하자 그는 익숙한 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항해사를 신기해하는데, 사실 다른 직업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해서 너무 신기한 티를 냈나 약간 민망한 마음도 들었다.
화제 전환을 위해 오늘은 뭘 했는지 물어봤다. 그는 오늘 포르투에서 10시 버스를 타고 넘어왔다고 했다. 정류장에서 마주쳤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며 리스본에서는 며칠 동안 머물 계획인지 물어보니 오늘 밤 야간 버스를 타고 세비야로 바로 넘어간다고 했다. 원래는 포르투에서 세비야로 바로 가고 싶었는데 직행 교통편이 없어 리스본을 경유하게 됐다고. 캐리어도 리스본 버스 정류장에 맡겨두고 왔다고 했다.
하루에 버스를 두 번이나 타다니 체력이 대단했다. 대화는 자연스레 여행 일정으로 이어졌고, 그는 한 달 동안 영국-프랑스-포르투갈-스페인 4개국을 여행한다고 말해줬다. 신기하게도 포르투에 도착한 날부터 나와 일정이 묘하게 겹쳤다. 심지어 둘 다 바르셀로나가 마지막 도시였는데,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날이 똑같았다. 기회가 되면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식사를 마친 뒤 바로 옆에 있던 상조르제성으로 일몰을 보러 떠났다.
상조르제성은 창문처럼 생긴 포토존이 예쁘다고 해서 가장 기대했던 곳이었다. 일몰을 기다리며 앉아있으니 관광객들이 올 때마다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를 커플로 오해하고는 우리 사진도 찍어준다고 해서 "Just friend(그냥 친구야)"라며 해명했던 건 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고, 우리도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그때 50대쯤 돼 보이는 백인 아저씨가 불쑥 다가와 핸드폰을 내밀며 "Wanna Airdrop?(사진 보내줄까?)"하고 말을 걸어왔다.
핸드폰 속 사진을 확인하니 너무 맘에 들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갈매기가 지나가면서 사진을 완성해 줬다. 감탄하며 과장 조금 보태 "Are you a photographer?(사진작가 아니야?)" 물으니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Kind of(뭐, 비슷해)." 대답했다. 기분 좋게 사진을 받고 우리도 마저 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해 질 무렵 리스본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하늘도 건물도, 온 세상이 온통 주황빛이었다. 그저 감탄만 나왔다. 사실 리스본은 볼 게 많지 않다는 인터넷 글을 여러 번 봐서 포르투에서 세비야로 넘어갈 때 마드리드를 갈지, 리스본을 갈지 고민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본에서 3일을 머물기로 결정한 건 직접 경험해 보고 판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린 과거의 나에게 고마웠다.
그 유명한 포르투의 모루 공원보다 이곳이 훨씬 좋았다. 모루 공원의 일몰도 아름답긴 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쉬웠었거든. 그런데 여기는 사람도 적당했고, 풍경도 완벽했다. 동행 오빠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하루만 머물고 가기엔 너무 아쉬운 곳이라며, 포르투에서의 일정을 줄이고 리스본에서 좀 더 머물걸 그랬다고 말했다. 이 풍경을 보고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
성에서 조금 더 일몰을 즐기고 싶었지만 폐장 시간인 9시가 다가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성을 빠져나왔다. 큰길을 향해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You two look good together(너희 잘 어울린다)!"라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또다시 "Just friend" 해명하며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우리와 함께 걷고 있던 긴 곱슬머리를 뒤로 묶은 백인 남자가 보였다.
그는 프랑스 출신으로 리스본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오늘은 혼자 여행 중이었다고.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한국에도 친구가 있다며 "I love Korea!"라고 말했다. 여행하면서 한국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난다고 생각했다(예의상이겠지만). '김구 선생님 뿌듯하겠다'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동행 오빠가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적이 있다며 그와 간단한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바닷가에 도착했고,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캐리어를 통째로 잃어버릴 뻔하기도 하고, 원했던 것보다 많은 나타를 사기도 했으며, 자꾸만 커플로 오해받기도 한 하루. 덕분에 하루가 참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