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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나눈 짧은 대화들

포르투에서 만난 사람들 02

by 진마리

걱정과는 달리 12인실 호스텔은 매우 쾌적했다. 남은 여행 내내 호스텔에서 머물렀지만, 포르투에서 묵었던 호스텔이 가장 좋았다. 방이 넓기도 했고,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것보다 외부에 있는 게 훨씬 더 편했다. 새벽에 이동할 때 다른 사람들을 깨울 걱정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스텔에서 지내며 새롭게 깨달은 또 다른 점은, 외국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호스텔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포르투에서도 60대 아저씨를 만났고, 이후에도 종종 중년 이상의 여행자들을 볼 수 있었다. 같은 유럽이라 더 편한 걸까? 이유야 어찌 됐든 그 모습이 멋져 보이고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은 가장 먼저 볼량 시장으로 향했다. 여행할 때마다 현지의 시장과 마트를 구경하는 걸 좋아하기에 기대가 컸다. 시장은 크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구경거리가 다양했다. 패션후르츠 주스를 손에 들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전날 만난 유학생 룸메이트가 추천해 준 아줄레주 문양의 조그마한 컵도 하나 샀다. 실용성은 없어 보였지만 기념품이니까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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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구경을 마친 뒤에는 근처에 있던 알마스 성당으로 향했다. 새파란 아줄레주 벽화가 돋보이는 성당이었다.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빠 보였다. 잠시 기다리자 혼자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양인 여성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 그녀도 사진 찍어줄 사람을 찾는 듯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Hi, can you take a photo of me?"

("안녕, 혹시 내 사진 찍어줄 수 있어?")


그녀는 "Sure" 대답하더니, 이어서 "Korean?"이라고 물어왔다. 혹시 한국인인가? 반가운 마음에 "어, 한국인이세요?"하고 묻자 그녀는 미국 교포라며 환하게 웃었다. LA 출신으로 니스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회사에서 한 달 동안 일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포르투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다음 여행지는 에든버러라고.


미드에서만 보던 교포를 실제로 만나니 너무 신기했다. 다른 외국인들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길게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확실히 한국인보다는 미국인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를 반가워해줘서 기뻤다. 나만 반가워한 게 아니라서. 그녀는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즐겁게 대화를 마친 뒤, 근처의 유명 나타 가게로 향했다.


어제와는 다른 곳이었지만 이번에도 나타 맛이 영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오후 계획을 짜기 위해 구글맵을 들여다봤다. 마침 바다가 눈에 띄었고, 포르투에서 버스를 타면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글이 떠올랐다. 구글맵으로 거리를 확인해 보니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즉흥적으로 바다를 보러 가기로 결정하고, 다시 볼량시장에 들러 간단한 간식을 챙긴 후 버스를 탔다.


버스는 2층 버스였다.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정신이 팔려 한참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나 찾아보니 공원이 눈에 띄었다. 사진으로 보기에 꽤 예뻐 보였고 호기심도 생겨서 무작정 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온통 공사판이었다. 살짝 무서워질 무렵 다행히 공원 입구가 보였고,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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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호수를 품은 이 공원은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곳 같았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내가 이 공원에 있는 게 신기하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라. 인종차별이라기보다는 정말 단순한 궁금증이 느껴져 불쾌하지는 않았다. 공원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니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거나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도 챙겨 온 책을 꺼내 펼쳐 들고 그들의 일원인 듯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다시 바닷가로 향하며 이곳에서 저녁을 먹을지 포르투 시내로 돌아가 저녁을 먹을지 고민했다. 바다에서의 일몰을 보려면 이곳에서 저녁을 먹어야 했는데, 그때까지 동양인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기에 식당에서 괜히 인종차별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됐다. 길거리에서 인종차별은 무시할 수라도 있지, 식당에서 인종차별을 당한다면 남은 하루의 기분을 망칠 것 같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다 결국 여기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겁이 난다는 이유로 일몰을 포기한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마침 바로 근처에 테라스가 있는 식당이 있었고,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뽈뽀를 팔길래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걱정과는 달리 종업원은 아주 친절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2인용 메뉴를 절반 가격에 1인용으로 제공해 준다는 설명도 해주고, 메뉴와 어울리는 와인도 추천해 줬다.


기분 좋게 뽈뽀 1/2 디쉬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한 뒤 바다를 배경으로 식사를 즐겼다. 뽈뽀는 먹어보지 못한 색다른 스타일이었고, 와인은 달콤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풍경이 모든 걸 완벽하게 만들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뒤 바닷가로 나가 낙조를 감상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학생들이 공놀이를 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용기를 내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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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에서의 마지막 날은 아침 일찍부터 렐루서점으로 향했다. 영화 '해리포터' 기숙사의 배경이 된 서점이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서양인들이 인증사진을 찍는 걸 많이 못 봤는데 이곳에서는 모두가 계단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해리포터 영향력이 크긴 하구나. 나도 간단히 구경을 마친 뒤 책 한 권을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미리 구매한 입장표와 카드를 내밀자, 직원이 단박에 "Korean?"이냐고 말을 걸어왔다. 놀라고 신기한 마음에 "Yes, how did you know that?(응, 어떻게 알았어?)" 물어보니, 직원은 내가 내민 하나 트래블로그 카드를 가리키며 "Well, Koreans all use this card(한국인들은 다 이 카드를 쓰더라고)."라며 웃으며 말했다. 카드로도 국적을 알아볼 수 있다니 재밌었다. 그걸 캐치한 직원의 눈썰미도 대단했고.


오후엔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골목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공연히 포르투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들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려나. 골목 구경까지 꼼꼼히 마친 뒤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우로 강으로 향했다. 강가를 거닐고 있으니 헤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유럽에 온 김에 나도 헤나를 받아볼까 싶어 디자인북을 뒤적이며 차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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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쯤 기다리니 내 차례가 되어 나비 디자인을 골라 자리에 앉았다. 10유로라는 안내를 들은 뒤 얌전히 어깨를 내어줬다. 곧 작업을 시작한 타투이스트가 어디서 왔냐고 말을 붙여왔다. "Korea" 대답하니, 그는 갑자기 "하나, 둘, 셋" 하며 한국어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놀라고 반가운 마음에 어떻게 한국어를 할 줄 아냐고 물으니 합기도를 배운 적이 있어서 다섯까지는 셀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안 배운 합기도를 배우다니. 이어서 그는 합기도는 콜롬비아에서 배웠다며, 사실 본인의 고향은 콜롬비아라고 말해왔다. 나 역시 반가운 마음에 "Ah, si?" 하며 스페인어로 "uno, dos, tres" 숫자를 세어 보였다. 상황은 금세 역전됐다. 이젠 그가 신기해하며 어디서 스페인어를 배웠냐고 물어왔다. 내 경우는 대학교 교양수업이었다. 짧은 스페인어에 영어를 섞어가며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다 보니 헤나가 완성되었다. 나는 "Muy bonito, gracias(엄청 예뻐, 고마워)" 만족과 고마움을 표했고, 그도 "Buen viaje(좋은 여행 돼)"라며 내 여행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그는 어떤 사연으로 포르투에서 헤나를 그리고 있을까. 태권도도 아니고 합기도는 어쩌다 배우게 됐을까. 남미 출신 이민자들은 대개 스페인으로 이민 가고 싶어 한다던데, 왜 포르투갈이었을까.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안은 채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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