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에서 만난 사람들 01
다음 날, 포르투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니스 공항으로 향했다. 탑승 수속을 마친 뒤 출발 시간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었다. 공항 의자에 앉아 포르투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던 중, 문득 예전에 영국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2020년 교환학생 시절 코로나로 인해 비행기 편이 많지 않았고, 에스토니아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영국에서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영국으로 간 뒤 영국에서 며칠 머물러야 했는데, 당시 영국행 비행기가 취소될까 봐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비행기는 정상 운행했고, 영국 공항에 도착해서야 공항 와이파이를 연결해 시내로 가는 방법을 급히 찾아봤더랬다. 영국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한국행 비행기가 취소될까 봐 주기적으로 메일을 확인했었다. 그때만 해도 다시는 유럽에 올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혼자서 이렇게 씩씩하게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기분 좋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포르투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면서는 3일간의 일정을 대략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장기 여행자라면 아마 공감할 텐데, 첫 도시는 설렘에 가득 차 계획을 꼼꼼히 세우지만 뒤로 갈수록 일정을 대충 짜게 된다. 나도 첫 도시였던 파리는 정보를 많이 찾아봤지만 이후 도시들은 유명한 관광지 몇 개만 대충 알아봤었다. 날씨에 따라 유동적으로 일정을 짜려고 했던 것도 있고.
시내에 도착해서는 우선 호스텔에 짐을 맡기러 갔다. 도착 시간이 14시였고, 체크인 시간은 15시였다. 혹시나 얼리 체크인이 가능할까 싶어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안 된다는 말이었다. '짐이라도 맡길 수 있는 게 어디냐' 생각하며 짐을 맡기고 호스텔 앞의 나타(에그타르트) 맛집으로 향했다.
평소에 에그타르트를 정말 좋아하기에, 포르투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바로 나타였다. 주문을 마친 뒤 테라스에 앉아 기대를 가득 안고 한 입 가득 나타를 베어 물었는데, 몹시 안타깝게도 나타의 맛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나타 하나만 보고도 포르투에 온다던데, 그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평소에 맛에 까다로운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쉬운 마음으로 나타를 해치운 뒤, 냅킨을 가지러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냅킨을 가지고 나오니 깜짝 손님이 와 있었다. 비둘기가 남은 나타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던 것. 살짝 당황했지만 비둘기를 무서워하는 편이 아니라 자리에 앉아 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비둘기는 도망가지 않고 계속해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유럽 비둘기나 한국 비둘기나 겁 없는 건 똑같다고 생각하며 동영상을 찍기 시작하는데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해야 할 접시인데 비둘기가 다녀가면 조금 그런가?' 싶어 비둘기를 쫓아내고 마저 자리를 정리했다.
나타 집에서 나와 시내를 조금 구경하고 나니 체크인 시간이 다가왔다. 포르투에서는 무려 12인실 혼성 호스텔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선택 이유는 단순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는 만큼 방이 넓어 쾌적해 보였고, 유일하게 소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원에게 안내를 받은 뒤 떨리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더니 두 명의 남성이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침대에서 대충 짐을 정리하고 있으니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Hi, Where are you from?"
("안녕,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다고 답한 뒤 그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니, 60대로 보이는 백발의 아저씨는 영국에서, 20대로 보이는 마른 남성은 핀란드에서 왔다고 했다. 시내를 구경하고 잠깐 쉬러 들어왔다가 마주쳤다고. 이번 여행 전까지 유일하게 방문했던 유럽이 에스토니아, 핀란드, 영국이었는데 마침 둘 다 핀란드, 영국 출신이라 무척 신기했다. 반갑기도 하고 대화를 더 이어 나가고 싶은 마음에 '너희 나라에 가 봤다고, 핀란드는 여행으로, 영국은 경유하느라 잠깐 머물렀다'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들은 그저 그러냐면서 다시 둘만의 대화로 빠져들었다.
나한테 말 건 건 예의상이었구나, 느끼며 마저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번엔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서 짐을 정리하며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녀 역시 체크인이 아닌 잠깐 방에 들린 모양새라 어디에 다녀왔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영어 발음이 심상치 않았다. 나만 느낀 게 아니었는지 영국 아저씨도 곧이어 그녀에게 혹시 영국 출신이냐고 물어봤다.
얼핏 들었을 때도 발음이며 억양이며 영국인 같다고 느끼고 있어서 교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국인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영국에서 유학 중이며 패션을 공부 중이라고.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녀의 유창한 발음에 방에 있던 모두가 놀라는 게 느껴졌다. 자연스레 영국 아저씨와 그녀는 대화를 이어나갔고,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한없이 부러웠다.
곧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그녀가 내 침대로 다가왔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침대 1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한국인이에요" 말을 건네니 그녀도 나를 보고 한국인인 것 같아 말을 걸고 싶었다고 했다. 간단한 기본 정보와 가장 궁금했던 '영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를 물어보니,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많이 노출돼서 자연스럽게 익힌 것 같다고 대답해 왔다. '이래서 다들 비싼 돈 들여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구나⋯ 조기 교육의 중요성⋯' 같은 생각을 하며 시간이 맞으면 하루 정도 같이 여행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호스텔을 나섰다.
호스텔을 나와서는 곧장 도우로 강으로 향했다. 사실 포르투에서는 노을을 기대하고 왔기에 낮의 도우로 강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리에 도착해 윤슬로 가득 찬 강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파리의 에펠탑을 봤을 때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곳은 단연 이곳이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강 근처를 구경하는데 마침 신문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전신으로 한번, 상반신으로 한 번 총 두 장을 찍어줬는데 첫 사진이 전신사진인 줄 몰라서 굉장히 어정쩡한 포즈의 사진이 나왔다. 친구들 보여주면 엄청 웃겠다, 생각하며 강가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아까 그 사진 기사가 내게 다가왔다.
"Excuse me, can you buy me a water?"
("혹시 물 한 병만 사다 줄 수 있어?")
그녀는 사진 기계를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2유로를 건네며 내게 부탁했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 '물론이지' 대답하고 근처에 있던 가게에서 물을 사는데 기분이 묘하긴 했다. '내가 2유로를 훔쳐갈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동양인이라 부탁한 거겠지'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물을 사다 주자 그녀는 무척 고마워하긴 했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남아있긴 했다.
강 주변을 거닐다 보니 어느덧 일몰 시간이 다가와 노을이 아름답다는 모루공원으로 향했다. 모루공원에서는 파리 한인 민박에서 만났던 한국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었다. 그 친구들과는 체크아웃하는 날 거실에서 잠깐 대화를 하게 됐었는데, 알고 보니 동갑에 전공도 똑같아서 짧은 시간 내 꽤 친해졌었다. 마침 포르투에서 묵는 일정이 겹쳐 만나기로 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근처 마트에서 그녀들과 만나 간단히 먹을 것을 산 뒤 모루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기 어려웠다. 미디어에서 보이는 모습은 굉장히 정제된 모습이구나. 어찌저찌 자리를 잡고 노을을 기다리며 파리에서의 대화에 이어 조금 더 깊은 대화를 시작했다. 둘은 친구사이로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같이 나왔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는 안 친했는데 같은 대학교 같은 과에 온 뒤에 오히려 친해졌다고.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신기하고 재밌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전공과 취업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사실 파리 한인민박에서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된 계기도 한 친구가 CJ 인적성 문제를 푸는 걸 본 이후였다.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여행하면서도 취업 걱정을 하는 게 싫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 어쩔 수 없다는 것, 한국에서 했던 인턴 경험들 등등 각자의 경험과 고민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민이 낯설지 않았다. 전공이 같기도 했지만, 전공을 차치하고서라도 취업을 준비하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고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에 몰입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노을은 뒷전이 돼버렸다. 그러나 그게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저 멀리 떨어진 유럽의 최서쪽 포르투갈에서, 외국인들에 둘러싸여서, 한국에서 가져온 고민을 나누는 경험이라니.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졌다.
사실 여행 중에 한국인 동행을 구하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경험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 여행자는 대부분 유학생이나 교환학생, 혹은 퇴사 후 여행 중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만남을 기준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전혀 몰랐던 타인이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깝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유학생, 교환학생, 퇴사자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같은 그룹으로 묶어 생각하며, 그들이 가진 이야기가 다 비슷할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각자가 가진 이야기가 하나하나 모두 다 다를 텐데. 이렇게 또 한 번 생각의 틀을 깰 수 있어 좋았다. 시야를 넓히는 방법은 정말 다양하구나, 느끼며 한 뼘 더 성장한 모습으로 포르투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