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에서 만난 사람들 04
한 시간쯤 지나 잠에서 깼다. 캐나다에서 왔다던 그녀는 밥을 먹으러 나갔는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도 고픈 배를 붙잡고 서둘러 호스텔을 나섰다. 뽈뽀(스페인식 문어 요리)가 먹고 싶어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갔으나 예약이 가득 차있어 자리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걸어 바닷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뽈뽀는 아주 맛있었다. 곁들인 화이트 와인도 무척 달콤했고. 기분 좋은 취기에 올라 바닷가로 향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귀찮음을 이겨내고 바닷가 근처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온 게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럭키비키잖아!
그렇게 에어팟을 꽂고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채 나만의 세계에 빠져 한참을 사색에 잠겼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저녁 아홉시였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니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며 젤라또를 먹기로 했다. 구글맵에서 가까운 젤라또 집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걷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Sorry?"
("네?")
끼고 있던 에어팟을 빼고 되물었다. 그러자 짧은 스포츠 머리가 돋보이는 그는 "Japanese?"라며 일본인이냐고 물어왔다. "No, Korean." 대답하며 전날 만났던 이탈리아 할아버지가 떠올라 경계했다. 다행히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혼자 있길래 말을 걸어봤다며, 어디로 가는 길이었냐고 물었다. 젤라또를 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하니 본인은 늦은 저녁을 먹으러 버거킹에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고 했다.
간단한 디저트가 먹고 싶었던 거였고, 그와의 대화도 재밌을 것 같아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파리에 살고 있으며 공항에서 일한다고 했다. 프로파일링 관련된 일이라고 했는데, 사실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 주에는 니스 공항에서 일을 해야 해서 니스에 처음으로 와 봤다고. 이어서 내게 여행 중이냐며 오늘 뭘 했냐고 물어보길래 근교에 다녀왔다고 하니, 어땠냐고 물어보며 본인도 여기서 일주일간 머물러야 하는데 좋은 곳이 있다면 추천해달라고 했다.
함께 구글맵을 들여다보며 여행 정보를 공유해주었고, 특별히 재밌는 일은 없었냐고 묻길래 전날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웬 이탈리아 '할아버지'가 본인의 집으로 자꾸만 나를 초대하려고 했던 바로 그 이야기. 할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작업을 걸었다고 하니 "Well, he's an Italian.(뭐, 이탈리아 남자잖아.)"라고 대꾸하는데 같은 유럽 내에서도 이탈리아 남자들의 이미지가 나이와 상관없이 바람둥이로 고착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대화는 자연스레 나이 이야기로 이어졌고 그는 내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스물 다섯이라고 하니, 반가워하며 그도 같은 나이라고 했다. 공항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과 짙은 수염 탓에 나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는데 동갑이라고 하니 내심 놀랐다. 내친김에 생일까지 따졌고 나는 2월생, 그는 9월생으로 그가 나보다 7개월 늦게 태어났다는 사실까지 알게됐다. 동갑이라는 사실에 짧은 시간 동안 친밀감이 급속히 올라갔다.
버거킹에 도착해서 그는 버거를 주문하며 내 것도 함께 주문해주겠다고 했다. 유럽 더치페이 칼같다던데, 아닌가. 마음은 고마웠지만 사양하며 내 아이스크림을 따로 주문했다. 조금 기다리니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나란히 앉아 각각 버거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동양인과 이야기해보는 건 처음이라며 무척 신기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실 알제리계 프랑스인인데, 태어나서 한 번도 알제리에 가본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는데 내가 혼자 여행하는 걸 보면서 자기도 혼자 갈 용기가 생겼다고. 이어서 한국에서 유럽까지는 몇 시간이 걸리는지, 어떤 항공사를 이용했는지, 여행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다양한 질문을 해왔다. 둘 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신기했다.
음식을 다 먹고 호스텔에 돌아가려고 하니 그가 갑자기 자전거를 타자며 제안해왔다. 낮에 바닷가를 따라 자전거를 탔는데 꽤 재밌었다고. 흥미롭긴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고, 내일 아침 일찍 포르투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해 체력을 아껴야 한다고 거절하자 그는 그럼 조금 산책하다가 호스텔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나도 이대로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기엔 아쉬워 제안을 수락했다. 다시 바닷가로, 그리고 다시 호스텔로 크게 한 바퀴를 돌면서 또 한 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문화 콘텐츠에 관한 거였는데,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한국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한국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도 나에게 프랑스 작품 여러 편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그가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려고 노력했던 순간이다. 처음에 내 이름을 물어봤을 때 'Mari'라고 대답했었는데, 갑자기 그게 내 진짜 본명이냐고 물어봤다. 사실 한국 이름은 따로 있는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에는 어려워 그냥 영어 이름으로 말한다고 대답하니, 그는 내 한국 이름을 알고 싶다고 했다.
말로만 알려주기엔 정확성에 한계가 있어 메모장에 영어로 타이핑해 보여주었고, 그는 몇 번이나 연습하며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려 애썼다. 이름에 이어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등등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간단한 인사말을 공유하기도 했다. 서로의 발음을 교정해주며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내심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같아 설레기도 했다.
문제는 호스텔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발생했다. "Do you have luggage?(너 가지고 온 짐 있어?)"라며 묻길래, 당연한 걸 왜 묻는지 의아해하며 "Yes, of course.(응, 당연하지.)"라고 대답하니 그는 짐을 싸서 호스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자신의 호텔에서 함께 자자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My hotel is near the airport. If you stay there tonight, it'll be easier to get to the airport tomorow."
("내 호텔이 공항 근처에 있어. 오늘 내 호텔에서 묵으면 내일 공항갈 때 더 편할거야.")
지금까지의 대화가 모두 이 목적이었나? 그와 대화하며 모든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의 진의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동양인이랑 처음 얘기하는 건 맞는지, 애초에 내가 동양인이라서 만만하게 보고 말을 건 건 아닌지, 프랑스에서는 이런 게 그냥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너무 보수적인건지 등등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Well, I'm not sure if that's a good idea."
("음, 난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아.")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유를 묻길래, '우리는 이제 막 만난 사이고, 남자친구-여자친구도 아니지 않냐'고 대답하니, 그는 '그럼 이제 남자친구-여자친구 하면 되지'라고 대답해왔다. ^^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현실적인 이유들을 대며 두어 번 더 거절하자, 그는 결국 알겠다며 대신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해둔 상태였기에, 나는 대신 지메일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너 지금 나랑 비즈니스 하자는 거야?'라며 잠깐 웃더니 곧이어 내 지메일을 받아적었다. 지메일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긴 했다. 그 뒤로 몇 번 메일을 주고 받다가 여행 중간에 인스타그램을 재활성화한 뒤에는 결국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교환했다.
그 후로 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몇 번 확인했는데, 그는 결국 말했던 알제리에도 가고 혼자 일본 여행까지 가더라. 공항에서 일해서 항공권 할인해주나? 생각해보면 처음 내게 일본인이냐고 물어봤던 것도 일본에 관심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동양인이랑 처음 얘기해본다는 것도 사실이었던 것 같고, 본인 호텔에 가서 함께 자자고 한 것도 그 문화에서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좋아하기에 여행을 떠나기 전 내심 이런 순간을 바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직접 겪어보니 나고 자란 환경에서 형성된 가치관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순 없었다. 딱 한 시간짜리 설렘이었지만, 그래도 그와 나눈 대화의 순간들은 충분히 즐거웠다. 그거면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