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에서 만난 사람들 02
짐을 풀고 있으니 그녀가 통화를 마치고 말을 걸어왔다. 이름과 국적을 묻길래 한국에서 온 마리라고 하니, 그녀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조이라고 소개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소개 후 밥을 먹고 오겠다고 나선 조이는 30분쯤 지나 돌아왔다. 그리고는 냅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예쁜 이름만큼 흥이 가득한 친구 같았다.
노래는 그녀가 샤워하는 순간부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대학 시절 기숙사 생활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어폰을 끼지 않고 영상을 보던 '이어폰 빌런'들이 있었는데. 이젠 노래까지 추가되다니. 다행히 한국에서 가져온 귀마개가 있어 커튼을 치고 귀마개를 낀 채 잠을 청했다.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는 체질이 새삼 감사했다.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호스텔을 나섰다. 뭘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간단한 브런치를 선택했고, 구글맵에서 숙소 근처 브런치 가게를 찾아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오전 10시쯤이었는데 이미 두어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다른 식당을 새로 찾기는 귀찮아 나도 줄을 따라 섰다.
줄을 서 있으니 뒤에서 웬 여자가 말을 걸었다. 자기 몸집만 한 배낭을 메고 있던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일주일 동안 프랑스 남부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제 여행 막바지라고. 나는 파리에서 막 도착해 앞으로 약 2주간 여행할 예정이라고 하자 그녀는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나는 언제든 유럽 전역을 여행할 수 있는 그녀가 더 부럽다고 대답했다.
수다를 떨다 보니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종업원이 우리에게 일행이냐고 물으며 지금 2인석이 없어 따로 앉아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일행이 아니라고, 따로 앉아도 된다고 대답하며 각자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아주 불편했다. 테이블이 무척 낮아서 등을 잔뜩 굽혀 먹어야 했다.
불편한 자세로 식사를 마친 후, 아직 식사 중이던 이탈리아 여성과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고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니스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 중 하나였다. 형형색색의 꽃부터 다양한 향기의 비누(사본), 막 그린 엽서까지 품목은 다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끌리는 건 없어 곧장 바닷가로 향했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바닷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니스에서 허락된 시간이 이틀밖에 없었기에 날씨에 개의치 않고 가져온 돗자리(식탁보)를 펼쳤다.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일기를 쓰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멍하니 햇볕 아래 누워있다 잠이 들었고, 눈을 떠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여유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분위기에 취해 조금 더 누워있다가 슬슬 전망대로 향했다. 정상까지 올라가기로 마음먹고 걷는데 뜻밖의 커다란 정원을 발견했다. 대부분 현지인인 것 같았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 돗자리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부모들의 모습,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다양한 삶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었으니까. 공연히 그들 틈에 스며들고 싶어 둘레길을 따라 한 바퀴 걷기로 했다.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반쯤 돌았을까, 눈앞에 선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울타리 너머 보트가 가득한 해안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니스를 검색했을 때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움에 마음이 들떴다. 저 동네는 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감상에 젖어 이어폰을 끼고 한참 동안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런 뜻밖의 순간이야말로 계획하지 않은 여행의 묘미라고 느꼈다.
마저 공원을 돌아본 뒤 다시 바닷가로 내려왔다. 바다를 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옆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힐끔 쳐다보니 50~60대 정도로 보이는 일행이 앉아 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니 내게 한국인이냐고 물으며 무척 반가워해주셨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여행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들은 이번이 두 번째 유럽 여행으로 패키지여행을 왔다고 했다. 잠깐 자유시간이 주어져서 전망대에 다녀왔다고. 나는 혼자 자유 여행 중이라고 하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대단한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괜히 머쓱해져서 종이 지도로 길을 찾아다녔던 20세기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곧이어 몇 살이냐는 질문에 스물 다섯이라고 대답하니, 젊음이 부럽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본인들이 몇 살 같아 보이냐고 묻길래 50대 초중반 같다고 했더니 꺄르르 웃으며 이제 60대에 접어들었다고 하셨다. 꺄르르 웃는 모습이 10대 소녀들 같아서 귀여웠다. 더 늙기 전에 최대한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싶다며 지금까지의 여행지 중 최고는 남미였다는 말을 덧붙이시는데 자연스레 부모님 생각이 났다. 나도 언젠간 부모님과 함께 꼭 남미에 가야지.
대화를 마무리하고 서로의 안전한 여행을 빌며 헤어지자마자 이번엔 웬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 대화가 너무 재밌어 보였나? 하는 순진한 생각을 잠깐 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으며 니스에 아파트가 있어 주말마다 쉬러 온다고 했다.
"Oh, that's nice!"
("와, 좋겠다!")
별생각 없이 대꾸하는데 대화 흐름이 이상했다. '음악을 좋아하냐, 우리 집에 좋은 스피커가 있다',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겠다'며 자꾸만 본인의 집으로 나를 초대하려고 했다. 뒤통수를 스치는 쎄한 느낌에 곧바로 거짓 약속을 만들어냈다. 호스텔 근처 식당에서 친구랑 저녁을 먹기로 해서 이제 출발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는 끈질겼다. 호스텔이 어디냐며 가는 길까지만 함께 가자고 했다. 거절할 핑계가 마땅치 않아 니스 시내를 향해 함께 걷기 시작했다.
"Why did you talk to me?"
("나한테 왜 말 걸었어?")
바닷가를 따라 걸으며 그의 진짜 속내가 궁금해 물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정말 황당한 대답. 'I love your eyes(네 눈이 좋아)'라며 눈을 찢는 제스처를 하는 게 아닌가. 지금 이게 인종차별 제스처인 걸 모르고 하는 건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대꾸를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하고 계속해서 걷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Wait, I have a friend at this restaurant. Let's get a drink."
("잠깐, 나 이 레스토랑에 친구가 있어. 한 잔 하자.")
약속이 있다는 내 말은 귓등으로 들은 건지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웬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친구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소란스러운 외침에도 주방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외려 식당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조합이었겠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그를 불러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사라졌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래도 호스텔까지 따라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73세였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말로만 듣던 이탈리아 남자 특징인가. 그러기엔 너무 할아버진데⋯.
여행이 주는 낭만에 취해 나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있었다. 말을 거는 모두가 선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며 바닷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