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만난 사람들 02
개선문에서 숙소로 돌아와 대충 짐정리를 하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 숙소 근처 재즈바에 갔다. 밤 10시에 공연이 시작된다는 공지와 함께 긴 줄이 보이길래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모두 일행과 함께인 데다 나 혼자 동양인이라 조금 위축됐다.
5분쯤 기다렸을까. 10시가 돼서 차례로 입장하기 시작했는데 지하에 있는 바라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공간이 그리 넓지 않은 데다 조명도 어두워 마치 동굴을 연상케 했다. 자리가 많지 않았던 탓에 일행과 함께 온 사람들은 서서 공연을 즐기고 있었는데, 다행히 제일 뒷줄 한 자리가 남아있어 나는 편하게 앉아서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혼자 온 사람들이 남은 자리에 먼저 타는 장면 같았다. 이럴 땐 혼자가 좋구나.
옆에는 중년의 백인 남성이 앉아 있었는데, 내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레 인사를 주고받았고 서로 혼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척 반가워했다. 임시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달까. 그리고 대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확신했다. 이 사람은 미국인이다. 노력해서 듣지 않아도 귀에 쏙쏙 박히는 발음 덕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LA 출신으로 오늘 파리에 도착했다고 했다. 나는 오늘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Are you kidding me?(뭐? 진짜?)'를 외치며 다음 달에 한국을 여행할 계획이라고 말해줬다. 아직 한국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고. 나도 'Now you have a friend in Korea!(너 이제 한국에 친구 생겼네!)'라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재즈가 주는 분위기와 약간의 알코올 덕에 거리감은 쉽게 허물어졌다.
대화는 아주 수월했다. 내가 아무리 엉망으로 말해도 그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공연을 즐기는 1시간 내내 관람과 대화가 반복됐다. 그동안 본인의 아들이 틱톡 스타라는 사실, 딸은 예술계에 종사하는데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 본인은 세계 여행을 좋아하는데 태국에 갔을 때는 너무 습해서 결국 여행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는 이야기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며 자식 자랑은 만국 공통이군,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내게도 질문을 던졌고, 나는 이제 막 일을 그만뒀으며 파리는 처음이고 내일 니스로 떠날 예정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 다음으로는 포르투갈에 갈 거라고 했더니 포르투갈 좋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다면 맛집을 소개해준다는 이야기도. 그러자 역시나 내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봤고 당시 비활성화 상태였기 때문에 대신 내 지메일을 줬다. 인스타그램을 재활성화해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던 순간.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는 밴드 세션이 한 번 바뀌었을 때였다. 그가 먼저 'Very nice'라며 연주에 만족을 표하길래, 나도 동의하며 다만 이전 세션이 조금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본인은 둘 다 좋았다고 답하는데⋯ 나도 모르게 또 평가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그냥 그 순간을 즐기면 되는 건데 말이다! 미국인답게 뛰어난 리액션 덕에 공연 내내 주변에서 우리를 힐끔거렸던 건 비밀이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공연을 즐기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뒤로 몇 번 메일을 주고받긴 했지만 한국에 왔다는 연락은 따로 받지 못했다. 여전히 세계를 표류하고 있으려나?
파리에서 마지막 만남은 길거리에서 이루어졌다. 니스행 오후 세 시 기차를 타기 전 오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셰익스피어 서점을 구경하러 가던 길, 누군가 'Are you alone?(너 혼자야?)' 하며 말을 걸어왔다. 길거리에서 누가 말을 건 건 처음이라 깜짝 놀랐다.
노란 스카프를 두른 그녀는 발리에서 태어나 자카르타에서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스위스를 여행한 후 자카르타로 돌아가기 전 파리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혼자라 심심했는데 마침 나도 혼자처럼 보여서 말을 걸었다고. 나였다면 절대 못 그랬을 것 같은데 대단했다.
그녀는 자연스레 나의 행선지를 묻더니, 본인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마침 나도 심심했던 터라 흔쾌히 수락했다. 셰익스피어 서점을 구경하러 간다고 하니 유명한 곳이냐고 묻길래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나왔다고 말해줬다.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영화로 넘어갔고 나는 그녀에게 <Before Sunset> 이야기를 하며 'Before' 시리즈를 추천해 줬다.
그러자 본인은 사실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스위스 여행을 결심했다며 한국을 무척 좋아한다고 고백해 왔다! 2020년 교환학생 시절 만났던 베트남 친구도 <사랑의 불시착>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사랑의 불시착>이 해외에서 엄청난 흥행이었다고 하더니 그 사실이 실감 나던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사실 한국도 정말 많이 가봤다고, 서울은 세 번, 부산과 제주도도 한 번씩 가봤다며 한국의 음식이 정말 맛있다고 했다. 최애 음식은 삼겹살과 비빔밥이라고. (한국어 발음도 꽤 좋았다.) 나한테도 인도네시아에 와 본 적이 있냐고 묻길래 아직 안 가봤지만 발리에 무척 가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질문은 'You?'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본인은 아들만 둘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You?'라며 나의 자녀 여부를 물어봐서 당황했다. 나는 아직 스물다섯이며, 결혼도 안 했고 그래서 당연히 자녀도 없다고 말했더니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긴 했지만⋯. 나 나이 들어 보이나⋯. 조금 (많이) 시무룩했다.
한 30분 정도 걸었을까.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다 보니 금방 서점에 도착했다. 그녀는 긴 줄에 아연실색하더니 이만 쇼핑하러 가야겠다며 작별 인사와 함께 훌쩍 떠났다. 아침부터 영어 하느라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할 땐 타이밍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순간.
관광과 낭만의 대명사 파리지만, 나는 파리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명소나 풍경보다는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한 장소가 떠오른다. 노력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던 사람들. 다음에 다시 파리에 오게 된다면 또 한 번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