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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여행의 시작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 01

by 진마리

사실은, 유럽에 혼자 가기 싫었다. 국내여행도 혼자 가 본 적 없는 내가 혼자 해외여행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떠나게 된 건 순전히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였다. 웃기지만 치안에 대한 걱정보다는 '내 사진 누가 찍어주냐'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결국 혼자 알아서 잘 찍긴 했지만⋯.


파리는 첫 번째 도시였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면서 '앞으로 3주 동안이나 유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전부 다 귀찮고 그냥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물론 여행을 시작하며 그런 마음은 금세 사라졌지만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땐 의외로 막막함이 더 컸다.




파리에서의 첫 만남은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우연히 시작됐다. 흐리다가 비가 쏟아지더니 갑자기 해가 뜨는 등 날씨가 오락가락했다.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터라 한참 사람 구경을 하며 멍 때리고 있는데 꼬불꼬불한 곱슬머리에 안경을 쓴 인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본인은 남프랑스를 며칠간 여행하고 직장이 있는 독일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나에게 여행객이냐고 물었다. 어제 한국에서 막 도착해 오늘이 이틀차라고 했더니, 루브르에 다녀오는 길이냐고 또다시 물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이번 여행에서는 루브르를 일부러 건너뛰었다고 했다. 이유를 궁금해하길래 파리는 꼭 다시 오고 싶은 도시라 일부러 아쉬움을 남겨두고 간다고 했더니 '맞는 말이네'라며 웃었다.


자연스레 한국과 인도로 대화 주제가 넘어갔고 그는 인도에서 요즘 한국 여행이 유행이라고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유튜브 때문인지 한국에서도 인도 여행 브이로그가 늘어나고 있다고 답했다.


"Do you have any plans to visit India?"

("인도에 방문할 생각 있어?")


그가 물었고 조금 고민하다 아직은 여자 혼자 가기엔 위험한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대신 친구의 친구가 인도인인데 결혼식에 친구가 초대받아서 만약 친구가 간다면 따라가 볼 생각이라고 하자 흥미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인도인 친구는 결국 파혼했다고 한다⋯.)


사실 그 친구도 나도 영어 발음이 좋지 않아서 서로 몇 번씩 되물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갔는데, 왠지 그게 참 좋았다. 'Sorry?'가 '아!'로 바뀌던 그 순간들이 무척이나 재밌었다. 여전히 독일에서 일하고 있으려나. 헤어지기 전에 내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봤는데 당시엔 계정을 비활성화했을 시기라 알려주지 못해 아쉬웠다.




다음 날엔 정각마다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카자흐스탄 여자가 사진을 찍어달라며 말을 걸어왔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몇 장 찍어주고, 정각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그동안 짧게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24살에 처음 파리에 와봤고 그게 어느새 13년 전이라며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친구가 파리에 살고 있어서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할 겸 방문했다고. 딸이 있는지 에펠탑을 배경으로 딸 사진을 찍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도 다음 달에 부모님을 모시고 카자흐스탄을 방문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카자흐스탄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봤었는데 아쉽게도 그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메모장에도 안 적혀있고. 아마 리액션하느라 정신없었나 보다.


짧고 별 거 아닌 대화였지만 에펠탑을 배경으로 함께해서 그런지 그 순간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함께 멍하니 에펠탑을 바라보던 사람이 낯선 여행객이라니. 여행을 시작할 땐 상상도 못 했던 순간이었는데 말이지.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걸어서 개선문을 보러 갔다. 한 20분 정도 걸었던 것 같은데 밤길이라 무서워서 앞서 걸어가던 사람들을 쫓아가듯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개선문에서는 강강술래 공연을 하고 있었다. 개선문 앞에서 한국인이 하는 강강술래 공연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어서 신기했다. 여러 국적의 관광객들이 둘러싸 구경하는 모습은 더 신기했고. 한국 공연인 건 알까? 궁금했다.


조금 구경하다가 개선문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있길래 슬쩍 다가가 들어봤더니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그쪽에서 먼저 날 발견했다.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영어로 묻길래, 'Por supuesto(물론이지)'라고 대답했다.


"Habla español?"

("스페인어 할 수 있어?")

"Sì, un poco."

("응, 조금.")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고 하자 본인들은 칠레에서 왔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Me encanta Corea(나 한국 좋아해)' 라길래 나도 칠레 좋아한다고 했다. (잘 모르지만) 다만 내가 스페인-스페인어를 공부해서 자꾸 반말인 Tú로 말이 나와서 미안했다. 남미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존칭인 Usted을 쓴다던데. 그리고⋯ 남미 발음에 익숙지 않아서 사실 절반은 이해 못 하고 그냥 웃으면서 끄덕였다.


신기했던 건 스페인어권 사람들은 웬 동양인 여자애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아도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되게 자연스러운 느낌. 나는 파란 눈의 서양인이 떠듬떠듬이지만 한국어로 나랑 대화하면 어떻게 한국어를 할 줄 아는지, 배우게 된 계기가 뭔지 놀라고 궁금할 것 같은데. 그만큼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여행의 시작은 막막했지만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점점 혼자 여행하는 것의 재미를 느꼈다.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잊기 싫어서 대화 내용을 메모장에 기록해 둘 정도였으니까. 영어와 스페인어를 더 잘했다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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