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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서는 사소한 친절에도 쉽게 감동받는 법

니스에서 만난 사람들 03

by 진마리

바닷가를 걷다 보니 아까 그 할아버지가 또 다른 여성에게 말을 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 타겟인 듯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몰래 멀리서 지켜보았는데, 다행히 할아버지 혼자 다시 길을 떠났다. 참 쓸데없이 부지런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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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편히 철푸덕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데 한쪽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녀는 영국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중국인으로 주말을 이용해 니스로 여행을 왔다고 했다. 오늘은 혼자 여행하고 내일 친구와 합류할 예정이라고.


그녀의 전공을 듣고 보니 새삼스레 그녀의 화려한 스타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에 띄었던 걸까. 이어서 혼자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말에는 '오⋯ 역시 중국 유학생 부자⋯'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한편으로는 이런 상념에 빠진 스스로가 웃겼다. 정신 차려!


그녀는 그리고 있던 그림도 구경시켜 줬는데,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담아 엽서를 보내고 받는 행위가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잠깐이지만 그녀의 재능이 부러웠다. 나도 사진과 영상으로 여행을 기록 중이기는 하지만, 이건 비교적 쉬운 방법이니까. 원체 아날로그적인 걸 동경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짧은 대화를 마친 뒤 저녁을 먹고 호스텔에 돌아오니 룸메이트 조이가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호스텔에 머무는 내내 그녀의 노래를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색한 것보단 낫지 뭐. 서로 하루의 일정을 간단히 공유한 뒤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머지 두 명의 룸메이트는 어제도 늦게 들어오더니 오늘도 밤늦게 돌아올 예정인 듯했다.


다음 날 아침, 근교 에즈빌리지를 가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머지 두 명도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쳐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나눴고, 두 사람은 친구 사이인 미국인으로 유럽 전역을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늘은 체크아웃하는 날이라 일찍 일어났다고. 준비하느라 분주하기도 했고 둘도 딱히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라 대화는 자연스레 거기서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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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를 마친 뒤 서둘러 근교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갔다. 시내에서 타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에 출발 정류장까지 갔는데도 이미 긴 줄이 서 있었다. 10분 정도 기다린 후 버스에 탑승했고, 카드는 그 자리에서 기사님께 직접 구매했다. 한국과는 다른 시스템이 신기했다.


버스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내 왼쪽으로는 현지인처럼 보이는 흑인 아저씨가 앉았다. 마침 가방에 어제 마트에서 산 초콜릿이 있어 그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학기 초 처음 보는 친구에게 마이쮸를 건네는 기분이었다.


"Hi, want some chocolate?"

("안녕, 초콜릿 먹을래?")


그러나 그는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Oh, no thanks(아, 괜찮아)'라며 정중히 거절의사를 밝혔다. 거절당한 경험은 처음이라 머쓱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초콜릿을 내 입으로 넣었다. 창밖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니 다행히(?) 아저씨는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내렸다. 모두가 스몰톡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달려 에즈빌리지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한 동네를 구경한 뒤 다음 목적지인 팔로마 비치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그동안 버스 카드를 충전하려고 했지만,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버스가 도착해 버렸다. 배차 간격이 길어 다음 버스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기사 아저씨가 현금을 받아주길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I'm sorry, but I didn't charge my card so can I pay by cash?"

("미안한데, 나 카드 충전을 못해서 현금으로 결제해도 될까?")


그러자 기사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돈을 내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타라고 했다. 이날 처음 만난 친절이었다. "Oh, Merci!" 감사인사를 전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버스에 탑승했다. 사소한 친절에도 마음은 쉽게 녹아내렸다. 팔로마 비치로 향하는 내내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를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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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는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 그러다 한 마을 풍경에 마음을 뺏겨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지도를 확인하니 바로 관광지로 유명한 에즈 빌리지였다. 계획 없이 내린 김에 온전히 마을을 즐겨보자 싶어 지도 어플을 켜지 않은 채 마음 닿는 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여유롭게 동네를 거닐다 보니 처음으로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중에 '좋다'라고 느낀 적은 많았지만, '살고 싶다'라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순간 프랑스 워홀까지 고민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계속해서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파란 바다가 나왔다. 바다를 즐기고 있는 모두가 동네 주민 같았다. 나만의 여행 코스를 개척했다는 고양감에 취해 이름 모를 바닷가에 또 한참을 누워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시간을 확인하니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것 같아 서둘러 팔로마비치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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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안고 도착한 팔로마 비치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앞서 너무 아름다운 동네를 만나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돌아갈까 고민하다 이왕 온 김에 해변까지 내려가보기로 했다. 내려가 보니 오른쪽으로 둘레길이 있었다. 발견했으면 또 가봐야지. 호기심에 이끌려 둘레길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끝까지 가면 뭐가 나오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둘레길은 꽤 길었고, 걷는 내내 마주한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길 왼편으로 내내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 저 멀리 다른 나라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중간쯤 걸었을 때 오른쪽으로 언덕길이 나타났다. 모든 길을 정복하겠다는 생각에 올라가 보니 교회처럼 보이는 건물이 나왔고, 맞은편으로는 무덤이 보였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교회와 무덤이라니. 낯선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모든 게 낭만적이었다.


계획을 세웠다면 만나지 못했을 풍경이라고 생각하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고, 무계획 여행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름답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풍경들을 뒤로하고 마저 둘레길을 돌았다. 길을 다 돌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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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 시내까지는 버스 한 번, 트램 한 번을 타고 돌아왔다. 초행길에 환승까지 겹치니 무척이나 피곤했다. 이대로는 저녁을 먹다가 잠들 것 같아 먼저 숙소로 향했다. 오전에 체크아웃한 미국인 자리에는 새로운 여성이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말을 붙여왔다.


환한 미소가 돋보이는 그녀는 캐나다 출신으로 인도에서 3주 동안 살다가 지금은 1년 동안 세계 여행 중이라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아직 한국은 못 가봤다며, 한국에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들뜬 그녀에겐 미안했지만 자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어서 그녀는 내게 직업, 여행 계획 등을 묻더니 갑자기 내 나이를 물어봤다. 스물다섯이라고 답한 뒤 나도 그녀의 나이를 물어봤다. 얼핏 봤을 땐 나보다 어려 보였는데 서른여섯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놀라며 그 나이로 안 보인다고 하자, 사실 자주 듣는 말이라며 해맑게 웃는데 아무래도 이런 반응을 기대하고 물어본 것 같았다.


마침 다음 질문이 오늘은 뭘 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오늘 막 니스에 도착해서 밀린 빨래를 하고 테니스 경기를 보고 왔다고 했다. 테니스 경기를 보러 가다니, 신기한 여행 코스였다. 궁금해서 더 묻고 싶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참기가 힘들었다. 아쉬운 마음은 묻어두고 '근교에 다녀와서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지금 잠이 간절하다'며 그녀와의 대화를 마무리한 뒤 곧바로 단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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