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에서 만난 사람들 01
파리에서 니스까지는 기차를 타고 갔다. 야간열차를 탈까도 생각해 봤지만 유럽에서 처음 타는 교통수단이고, 밤이라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낮 기차를 선택했다. 조금 더 편안하고 비싼 위고(Ouigo)와 저렴한 떼제베(TGV)가 있었는데 난 가난한 여행객이니까 떼제베를 골랐다. (그마저도 16만원이었다.)
혹시나 역을 찾지 못해 기차를 놓칠까 봐 출발 30분 전에 기차역에 도착했다. 걱정과 달리 기차역을 찾는 건 수월했다. 탑승 가능 시간이 되자마자 기차에 올라 여유롭게 캐리어에 자물쇠를 걸고 자리를 잡았다. 2층 기차는 처음이라 신기했다.
그렇게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걸었다. 프랑스인 가족이었는데,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본인들의 자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자리를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현지인인 그들이 더 정확할 것 같아 불안한 마음으로 내 표를 보여주었다. 표를 자세히 살펴본 그들은 내 자리가 (예를 들면) 1번 열차 72번이 아니라 2번 열차 72번이라고 알려줬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였다.
깜짝 놀라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리를 비켜주었고, 야무지게 묶어두었던 캐리어 자물쇠를 풀어 1층으로 내려갔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진짜 내 자리를 찾기까지 땀이 줄줄 났다. 몇 분 전만 해도 눈에 보이는 좋은 자리에 캐리어를 두었다며 의기양양해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웃겼다.
진짜 내 자리를 찾아가자 출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탑승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짐칸도 대부분 차 있었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캐리어를 둘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자리 가까운 곳에 둘 수 있어 안심했다. 물론 자물쇠로 다시 야무지게 묶어두기도 했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했고, 파리에서 니스까지는 6시간 정도 걸려서 나도 슬쩍 눈을 붙였다. 1시간 정도 잤을까.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눈이 떠졌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터라 옆자리 사람에게 "빠흐동(실례합니다)" 양해를 구하고 복도로 나섰다. 화장실은 남녀공용으로 두 명이 줄을 서 있었다.
5분쯤 기다리자 내 차례가 됐다. 볼 일을 본 후 물을 내리려는데 아무리 찾아도 물을 내리는 버튼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너무 당황스러웠다. 레버처럼 보이는 모든 걸 죄다 시도해 봤지만 변기는 고요하기만 했다. 얼굴에 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다음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I'm so sorry, but I don't know how to⋯ handle this⋯."
("정말 미안한데, 나 이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잔뜩 빨개진 얼굴로 화장실 문을 열고 밖에 줄을 서있던 중년 남성에게 건넨 말이다. 심지어 '물을 내리다'라는 말이 생각이 안 나서 손가락으로 변기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창피한 순간이다. ('물을 내리다'는 'flush the toilet'이라고 한다. ^^)
"Oh, no worries."
("아, 괜찮아.")
다행히 친절한 남성은 손만 씻을 생각이었다고 말하며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다음 친절히 변기 물도 내려주었다. 아마 발로 밟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나 간단했다니! 허망한 마음도 잠시 나는 'Thank you so much'를 연발했고 그는 손을 휘저으며 유유히 자리로 돌아갔다. 문제가 해결되자 나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작은 용변이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뭐야⋯.
두 차례의 작은 소동을 겪은 뒤 드디어 니스에 도착했다. 니스에서는 처음으로 혼성 4인 호스텔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체크인을 한 뒤 배정 받은 방을 찾아갔는데, 아무리 카드키를 가져다대도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섯 번쯤 시도했을까, 방 안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Who are you?"
("누구세요?")
반가운 마음에 '오늘 여기서 묵을 예정인데 카드키가 작동하지 않는다, 혹시 문을 열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널 어떻게 믿고 문을 열어주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맞는 말이었다. 체크인 카운터에 가서 카드키를 바꿔오겠다고 말한 뒤, 카운터에 가서 카드키가 작동하지 않는다며 보여줬다.
그러자 직원이 미안해하며 301호가 아니라 307호였다고 글씨에 선을 하나 추가해 줬다. 아놔⋯. 다시 3층으로 올라가 307호에 카드키를 가져다 대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얼굴도 모르는 301호 친구한테 괜히 겁을 준 것 같아 미안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자 사람은 안 보이고 널브러진 짐들만 보였다. 짐을 풀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머리를 예쁘게 땋은 흑인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의 첫 룸메이트! 반가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인사를 하려는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큰 목소리로 잔뜩 화를 내면서⋯. 그 모습에 쫄아서 그녀가 통화하는 내내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짐만 정리했다.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은 것 같은 니스에서의 첫날. 이 여행⋯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