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에서 만난 사람들 02
리스본에서의 둘째 날은 24시간권 교통카드를 끊고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도둑시장. 적당히 둘러만 보고 오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규모도 크고 품목도 다양해서 오래 머무르게 됐다. 특히 눈길을 끈 건 목걸이였는데 하나에 2유로, 두 개에 3유로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혹해 홀린 듯 매대로 다가갔다.
목걸이를 팔던 분은 백발의 할머니였다. 그녀에게 영어보다는 스페인어가 편할 것 같아 스페인어로 "Puedo probarlo?(이거 차봐도 돼요?)" 물어보자 그녀는 시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착용해 본 뒤에 다시 "Quiero este y este(이거랑 이거 주세요)" 말을 걸었고, 그녀는 "Tres euros(삼 유로야)"라며 무심하게 포장을 시작했다. 나는 스페인어로, 할머니는 포르투갈어로 대화했는데도 어느 정도 소통이 돼서 신기했다.
도둑시장 구경을 마치고 나서는 발견기념비와 벨렝탑을 보러 벨렝 지구로 향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먼저 그 유명한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나타를 맛보러 향했다. 10명 정도 줄을 서 있었지만 금방 줄어들었다. 1개부터 구매 가능한데도 모두 기본적으로 3개부터 구매하는 게 웃겼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로 옆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함께 구입한 뒤 수도원 앞 공원에 철푸덕 앉았다.
기대하고 기대하던 순간. 잔뜩 침이 고인 채 나타를 한 입 베어 물자마자 감격하고 말았다. 그동안 먹었던 나타는 가짜. 수도원 나타가 진짜⋯. 이 나타만을 위해 리스본에 다시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준 슈가파우더와 코코아파우더도 뿌려 먹어봤지만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순수한 맛이 가장 좋았다. 단숨에 나타 세 개를 해치우고 나니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맛있는 디저트 하나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인간이란 참 단순하다 싶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타를 먹고 바로 발견기념비를 보러 가야 했지만 공원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여기서 조금 쉬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사람들을 구경하며 오랜만에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걸고, 밀린 핸드폰을 하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벨렝탑까지 가기엔 시간이 빠듯할 같아 발견기념비만 보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벨렝탑은 다음에 나타 먹으러 와서 봐야지.
시내로 돌아와서는 리스본의 상징인 노란 트램을 보러 갔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웠다. 트램을 타고 내려온 뒤에는 24시간권 교통카드를 제대로 활용하고 싶어 무작정 눈에 보이는 아무 버스나 탔다. 그리고 아무 곳에서나 내려 동네를 구경했다. 이걸 해질녘까지 반복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즉흥적인 여행을 꿈꿨지만, 한 번도 실현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로망을 리스본에서 이루다니! 새삼스럽게 행복했다. 여행이 허락한 낭만이었다.
둘째 날 시내 곳곳을 구경한 이유는 마지막 날 근교 투어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에 들기 전 다시 한번 미팅 포인트와 약속 시간을 확인한 뒤, 업데이트된 사항이 없는지 메일도 점검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약속 시간인 9시 30분에 맞춰 미팅 포인트로 향하면서 혹시 몰라 메일함을 열었는데, 어젯밤엔 없던 메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 최소 인원 미달로 인해 투어가 취소됐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황당했다. 현지 호스텔에서 진행하는 투어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투어 신청을 받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원이 미달되면 취소되는 시스템인 듯했다. 근교에 가보고 싶었는데 뭐 어쩌겠나. 혼자 택시로 다녀오기엔 금액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아직 24시간권 교통카드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침 산타 후스타 엘리베이터도 안 타봤으니, 우선 거기로 가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 도착하니 계단까지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전날 교통카드를 발급받은 시간은 10시 10분, 지금은 9시 30분. 40분 안에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교통카드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더뎠다. 이러다 못 탈 수도 있겠다, 걱정하고 있는데 다행히 만료시간 2분을 남겨두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했다.
아쉽게도 엘리베이터는 그냥⋯ 엘리베이터였다. 앤틱한 내부가 신기하긴 했지만 6유로를 내고 탔다면 아까웠을 것 같다. 엘리베이터까지 타고나니 이젠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시내는 전날 충분히 구경했다. 뭘 할지 고민하다가 우선 나타를 하나 사서 바닷가로 향했다. 첫째 날 앉았던 곳에 다시 앉아 나타를 먹으며 구글맵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쓱쓱 여기저기 확대해 보니 '카스카이스'라는 바다가 좋아 보였다. 다행히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마음을 정했으니 걸음을 옮겨야지. 들뜬 마음으로 기차역에 도착해 기계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표를 구매했다. 그러나 플랫폼이 어딘지 혼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직원에게 플랫폼 위치를 물어보니, 잘못된 표를 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차역도 잘못된 곳이었다. 결국 바로 옆에 있던 올바른 기차역 창구에서 사람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맞는 표로 교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모든 과정이 즐겁고 재밌었다. 막 신이 났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하나하나 부딪혀 가며 알아가는 모습이 괜히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기차표를 구매한 뒤 카스카이스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로 빼곡히 가득 찬 기차에 몸을 맡기며, 문득 투어가 취소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혼자 표를 구매해 기차를 타 볼 일도 없었을 테니까. 일정도 내 마음대로 여유롭게 짤 수 있었다. 이번에 못 간 신트라는 다음에 가면 되는 거였다.
카스카이스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제일 먼저 바닷가로 향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사실 4월로 유럽 여행을 계획하면서 지중해를 즐기지 못하는 게 내심 아쉬웠었다. 4월은 바닷물에 들어가기엔 아직 쌀쌀한 날씨니까. 그러나 카스카이스에서는 모두가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카스카이스는 원래 가려고 했던 투어 일정에는 없던 곳이었다. 투어가 취소되지 않았다면 못 만났을 풍경이라고 생각하니 투어가 취소되길 더욱 잘했다고 느껴졌다. 바다도, 시내도 알록달록 예쁜 동네였다. 바다만 보고 가기엔 아쉬워 구글맵을 한 번 더 들여다보니 '지옥의 입'이라는 관광지가 눈에 들어왔다.
'지옥의 입'까지는 도보로 30분 정도 걸렸다. 걸어갈지 택시를 탈지 잠시 고민했지만 해안길을 따라 산책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반짝이는 바다 위 유유자적한 보트들에 반해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 감상하다 보니 1시간이나 걸렸거든.
지옥의 입에 도착한 후 구경을 마치고 나니 달콤한 게 땡겼다. 마침 바로 앞에서 젤라또를 팔길래 나도 하나 구매해 자리에 앉았다. 4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젤라또를 먹고 있는데, 빈자리를 찾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You can sit here(여기 앉으세요)." 자리를 가리키니 노부부는 화색하며 "Thank you" 인사를 건네고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했고, 노부부는 미국 보스턴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초등학생 때 원어민 선생님이 보스턴 출신이었던 기억이 떠올라 반가웠다. 노부부는 일주일 동안 신트라, 카스카이스 등등 리스본 곳곳을 여행했다고 했다. 나도 파리, 니스, 포르투를 거쳐 리스본에 왔다고 이야기하는데 언급하는 도시마다 "Oh, I've been there too(나도 거기 가봤어)" 라길래 내심 부러웠다.
이어서 내게 다음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길래 '세비야'라고 대답했는데, 내 발음 문제로 세 번이나 되묻고 나서야 알아들어서 조금 머쓱했다. (^^) 세비야라는 걸 알게 된 뒤엔 갑자기 스페인 역사 강의가 시작됐다. 할아버지는 안달루시아와 카탈루냐의 지역감정에 대해 설명하더니, 안달루시아의 해방 역사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척 흥미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를 이해하기도 힘들어지고 흥미도 떨어져서 리액션이 점점 방전됐다. 아는 지식 자랑하는 건 전 세계 아저씨(할아버지)들 공통점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게 티가 났는지 갑자기 대화 주제가 한국 콘텐츠로 바뀌었다. '김씨 편의점', '기생충' 등 한국 콘텐츠들을 언급하며 정말 재밌고 대단하다고 칭찬하길래 적당히 동조하니, 이어서 '패스트 라이브즈'를 봤냐고 물어왔다. 들어는 봤지만 아직 보지는 못했다고 하니 매우 감동적인 영화라며 꼭 보라고 추천해주기도 했다.
한국 콘텐츠의 영향력이 크긴 하구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스몰톡할 수 있는 주제가 있음에 새삼 고마워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대답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더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모두 빈 젤라또 컵을 들고 있었다. 노부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고, 우리는 서로의 즐거운 여행을 빌며 헤어졌다.
포르투갈에서 미국인 부부에게 스페인 역사 강의를 듣고 한국 영화를 추천받을 확률이라니. 정말 위아더원, 왓어스몰월드다 느끼며 나도 리스본 시내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