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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서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

리스본에서 만난 사람들 03

by 진마리

리스본 시내에 도착해서는 저녁을 먹을 만큼 배가 고프지 않아 또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광장 한편에서는 두 명의 남성이 펼치는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었다.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이었는데, 몸을 활용한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감탄을 자아냈다.



41C63914-4085-4167-B270-9A72BB92692C_1_105_c.jpeg 열정적인 버스킹 공연


다만 그만큼 수금 방식도 적극적이었다. 공연 도중 그들은 모자를 내밀며 관객들 앞을 돌기 시작했고,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오길래 순간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1유로라도 낼 걸 그랬나 싶다. 스스로에게 그 정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은 여행이었나 싶어서 그 부분이 아쉽다.


공연에서 도망쳐 온 곳은 또다시 바다. 때맞게 하늘이 아름다운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해가 완전히 넘어가길 기다리는데 옆에서 쭈뼛거리며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힐끔 쳐다보니 10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 셋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다. 에어팟을 빼며 "Hey" 하고 인사하자, 기다렸다는 듯 "Hi" 하며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Yes, where are you from?(응, 너희는 어디서 왔어?)"

"I'm from Bangladesh(방글라데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아이들은 남매 사이로, BTS를 좋아해 한국인처럼 보이는 내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누나들의 최애 멤버는 각각 뷔와 정국. 역시 잘생긴 게 짱이군. 그들은 가족여행 중으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거쳐 리스본에 도착했고, 다음 목적지는 라고스와 파로라고 했다. 아마 멀지 않은 곳에 부모님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신나서 BTS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더니 갑자기 내게 "사랑해" 하며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등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특별히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재잘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호응을 위해 "How do you say 'I LOVE YOU' in your language?(너희 언어로는 '사랑해'가 뭐야?)"라고 묻자, 아이들은 "아미두바께발로바쉬" 라고 알려줬다.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워 여러 번 음절을 나눠 발음해 준 끝에 겨우 따라 할 수 있었다. 언젠가 방글라데시에 간다면 꼭 써먹어야지.



C0A8D633-B29D-4839-ABD4-040CFCC3C75F_1_105_c.jpeg 방글라데시 아이들이 찍어준 사진


수다를 가장한 한국어 뽐내기 시간이 끝나갈 때쯤, 마침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던 터라 아이들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아이들은 하나의 핸드폰에 옹기종기 모여 멋진 사진을 찍어줬다. "고마워"하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니 아이들은 "안녕"하며 작별을 고하고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저녁은 호스텔 바로 앞 식당에서 해결했다. 뽈뽀를 주문하고 "Obrigada(감사합니다)" 인사를 건네니 웨이터가 놀라며 "Wait, are you portuguese?(너 포르투갈 사람이야?)"라고 물었다. 내 'Obrigada' 억양이 너무 자연스러웠다는 것. 아니라고, 여행하는 동안 너무 많이 듣고 말하다 보니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고 대답하며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다들 유학을 가는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 나라에서 직접 생활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예를 들면, 전날 호스텔에서 세탁을 하려 했는데 건조기가 고장 나버린 일. 세탁은 이미 끝났는데 방에는 마땅한 건조대도 없었다. 급히 구글맵에서 근처 세탁방을 찾아봤고, 다행히 도보 5분 거리에 세탁방이 있었다. 그러나 무거운 빨래를 이고 지고 도착한 세탁방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세탁방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10분. 문에는 '밤 10시까지 운영'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한국의 24시간 세탁방에 익숙했던 터라 운영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였다. 그 무거운 빨래를 그대로 들고 호스텔로 돌아가면서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었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친 뒤 호스텔에 맡겨둔 짐을 찾아 리스본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택시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괜히 감상에 젖기도 했다. 오히려 시내 외곽으로 갈수록 현대적인 건물이 많아졌던 기억도 난다. 리스본 정말 좋았는데. 당분간은 올 일이 없겠지.



KakaoTalk_Photo_2025-03-09-18-57-33.png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는 감상에 젖어있을 새가 없었다. 서둘러 야간버스를 타는 플랫폼을 찾아야 했기 때문. '제일 끝 라인으로 가라'는 인터넷 글을 떠올리며 무작정 앞을 보고 걷는데, 멀리서 "칭챙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럽에서 겪은 처음이자 마지막 인종차별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길을 찾느라 바빴기 때문에 대꾸해 줄 겨를이 없었다. (안 바빴어도 무시했겠지만)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니 그쪽에서도 추가적인 반응은 없었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는데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야간버스 플랫폼을 찾았고, 20분의 기다림 끝에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내 옆자리엔 아무도 탑승하지 않았다.



리스본에서 세비야까지는 약 7시간. 야간 버스를 타는 것도, 버스로 국경을 넘는 것도 처음이라 설렜지만 피로감이 더 컸다. 내일을 위해 체력을 아껴야 했다. 가방에서 안대와 귀마개를 꺼내 쓰고 좌석 한쪽에 몸을 한껏 꾸기고 앉아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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