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에서 만난 사람들 01
야간 버스에서는 잠들었다가 깨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중간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옆에 누군가 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어나 자리에 앉았고, 버스가 출발하면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숙소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이런 방법은 정말 젊을 때만 가능할 것 같았다.
세비야에 도착하니 아침 7시 30분. 호스텔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는데, 옆에서 누군가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내 또래처럼 보이는 한국인 여성 두 명이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 셋 다 같은 야간 버스를 타고 왔고, 그녀들도 택시를 타고 호스텔로 가려던 참이었다. 호스텔을 확인하니 한 명은 나와 같은 TOC 호스텔에, 다른 한 명은 근처의 다른 호스텔을 예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니들은(둘은 동갑이었다) 숙소 거리가 서로 멀지 않으니 택시비를 아낄 겸 택시를 함께 타고 가자고 제안해 왔고 나도 흔쾌히 승낙했다.
하지만 아침 일찍이라 그런 건지 큰 사이즈의 택시를 불러서 그런 건지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10분 넘게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쉽게 잡히지 않을 것 같아 결국 버스를 타기로 결정하고 황급히 인터넷에 '세비야 시내버스 타는 법'을 검색해 봤다. 다행히 현금을 내고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찾았고, 구글맵에서 노선을 확인한 뒤 다 함께 버스를 타고 호스텔로 향했다.
스페인에서는 론다를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유명한 체인 호스텔인 TOC 호스텔에 묵었는데, 도시별로 호스텔을 찾아보기 귀찮기도 했고 24시간 체크인/체크아웃이 가능하다는 점 역시 큰 장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캐리어를 끌고 호스텔에 도착하니 인상 좋은 호스텔 직원 둘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마 우리가 일행인 줄 알았는지 우리를 같은 방으로 배정해주기도 했다.
꽤 지친 상태였고, 딱히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혹시 얼리 체크인이 가능한지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12시부터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신 짐을 맡길 수는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 사물함에 짐을 넣어두고, 투어를 예약했다는 언니와 헤어져 우선 아침을 먹으러 향했다.
스페인에서 첫 식사는 브런치로 정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그때 브런치가 땡겼다. 구글 맵에서 영업 중인 식당을 찾아가니 이제 막 오픈했는지 분주한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유럽에 온 목적 중 하나였던 스페인 사람이랑 스페인어로 대화하기, 드디어 그 시간이 다가왔다. "Hola(안녕)" 인사를 건네고 "Uno(한 명이야)"라고 이어 말하니 직원이 웃으며 자리를 안내해 줬다. 시작이 좋았다.
메뉴를 살펴보니 모두 맛있어 보였고, 그중에서도 과일 요거트가 땡겼다. 요거트만으로는 아쉬워 쿠키와 커피도 함께 주문했다. "Quiero esto y esto(이거랑 이거 주세요)" 라고 주문에 성공하고 나니 괜히 뿌듯함이 몰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브런치는 정말 맛있었다. 유럽 딸기 맛없다던데 너무 맛있던데? 천천히 식사를 하며 식당을 구경하니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해 주문하고 음식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더러 포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도 그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성공적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니 또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우선 과달키비르 강으로 가보기로 했다. 강까지 가는 길엔 말들이 정말 많았는데, 세비야는 원래도 관광객들을 위해 말이 이끄는 마차를 운영하지만 내가 여행한 기간이 마침 세비야 축제 기간이라 더욱 많은 마차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생기 가득한 세비야의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
시내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과달키비르 강에 도착했다. 강에서는 조정 연습이 한창이었다(알고 보니 세비야는 조정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조정 연습도 구경하고, 강변을 조깅하는 사람들도 구경하다 보니 슬 졸음이 몰려왔다. 체크인까지는 아직도 2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벤치에 앉아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후드 모자를 뒤집어쓰고 가방을 품에 꼭 안은 채 벤치에 누웠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잘 자는 체질에 피로도 쌓여있어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개운하게 잠에서 깨니 어느새 1시간이 지나 있었다. 한국에서도 안 해본 노숙을 스페인에서 하다니.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느끼며 누워서 핸드폰을 뒤적이는데 웬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Qué hora es?(지금 몇 시야?)"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몽사몽한 상태였는데 신기하게도 스페인어가 들렸다(물론 아주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하지만 내뱉는 건 쉽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한 뒤 더듬거리며 "Once⋯ cuarenta.(열한 시 사십 분)" 대답하니 할머니는 "Gracias(고마워)" 하며 쿨하게 떠났다. 한국어로 치자면 "십일(11)⋯ 사십(40)." 이라고 숫자만 읊은 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리둥절한 상태였다가 할머니가 떠나고 나서야 사태 파악이 됐다. 누가 봐도 동양인인 나에게 당당하게 스페인어로 말을 건 것도, 핸드폰만 있다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물어본 것도 의아하면서 신기했다. 와중에 용케 알아듣고 대답한 내가 대견하기도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상대가 누가 됐든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심지어 스페인이 아닌 나라에서 만나도!). 편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스페인어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 좋은 자세 같긴 하다. 한국에서는 외국인에게 대개 영어로 말을 걸곤 하니까. 자부심 있으면 좋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체크인 시간이 다가왔고 나도 몸을 일으켜 호스텔로 향했다.
호스텔에 체크인한 뒤엔 밤에 못 했던 샤워를 하고 잠깐 쪽잠을 자고 나왔다. 마침 호스텔 바로 앞에 츄러스 집이 있었다. 포르투갈에 나타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츄러스가 있지. 한껏 기대에 부풀어 가게에 들어갔지만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나를 응대해주지 않았다. 쭈뼛쭈뼛 자리에 앉으니 웨이터가 다가와 말없이 메뉴판을 건네줬다. 어차피 츄러스만 먹을 생각이었기에 곧바로 주문을 마쳤고, 머지않아 따끈따끈한 츄러스가 나왔다.
하지만 츄러스는 정말 맛없었다. 너무 느끼해서 속이 느글거렸다. 원체 느끼한 음식에 쥐약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건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불친절한 직원 탓에 왠지 더 맛없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남기기는 아까워서 꾸역꾸역 츄러스를 다 먹은 뒤 빠르게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상큼함이 필요했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는 자연스레 야오야오로 정했다.
야오야오는 토핑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스페인 체인 요거트 아이스크림집이다(한국으로 치면 요아정). 피스타치오와의 조합이 유명했고, 아침에 먹었던 딸기도 맛있었어서 피스타치오와 딸기 토핑으로 제일 작은 사이즈를 주문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받고 한 입 떠먹은 순간⋯ 너무 맛있어서 감탄했다. 피스타치오가 이런 맛이었구나! 요거트랑 궁합이 찰떡궁합이었다.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해치운 뒤 스페인에 있는 동안 1일 1야오야오를 하기로 다짐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는 'Feria de abril' 축제장을 갈지 말지 고민했다. 밤에 더 재밌는 구경거리가 많다길래 가보고 싶었지만 전날 야간 버스를 타 피곤하기도 했고 호스텔에서 축제장까지 거리도 꽤 멀어서 위험할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결국 다음날 축제장에 가기로 결정하고 호스텔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언젠가 다시 세비야에 오게 된다면, 그때도 축제 기간에 맞춰서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