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방인으로 여행하며 기대하는 것들

세비야에서 만난 사람들 02

by 진마리

세비야에서의 이튿날, 축제장에 가기 전 과달키비르 강 건너편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관광지가 강 안쪽에 몰려있어 강 건너편까지 둘러보는 관광객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시장을 둘러보고 골목골목을 구경하며 오전 시간을 보낸 뒤, 배가 고파 점심을 먹으려고 구글맵을 열었다. 그런데 미처 고려하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스페인의 점심시간은 아주 늦게 시작된다는 것.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확인할 때마다 모두 오후 2시에 오픈한다는 소식만을 알려왔다. 현재 시각은 오후 12시 30분. 점심을 먹으려면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절망스러웠다. 겨우 오후 1시 30분에 여는 식당을 찾아 그곳에 가기로 마음먹고, 간단한 간식이라도 사러 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정말 재밌는 경험을 했다.


강 건너편은 관광객들이 비교적 덜 오는, 현지인들이 주로 생활하는 동네다. 그래서 그런지 바로 전날 방문했던 숙소 근처의 마트와 가격 차이가 아주 많이 났다. 약 1.5~2배 정도. 진짜 현지인들이 다니는 마트에 온 것 같아서 신났다. 마트 규모도 컸던 덕에 30분 정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런 걸 먹는구나. 나도 간단하게 과자, 과일, 주스, 하몽 등을 산 뒤 오픈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향했다.




내가 고른 식당은 나 같은 혼자 여행객에게 아주 좋은, 메뉴를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타파스 집이었다. 15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한 팀이 줄을 서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다 보니 오픈 시간이 되어 앞치마를 두른 식당 주인이 나와 순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


"Y?(다음?)"

"Me! Yo!(나! 저요!)"


순서를 놓칠까 봐 재빨리 대답한 탓에 나도 모르게 영어가 먼저 나왔고, 황급히 스페인어로 다시 대답하며 내 차례를 확고히 했다. 순서를 정말 뺏기기 싫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 같아 살짝 민망하기도 했지만 배고픔이 더 컸다. 이 배고픔은 2시간짜리라구. 순서를 확인받은 뒤엔 차례대로 자리를 안내받고, 메뉴를 천천히 살펴보며 주문을 마쳤다.


모든 타파스 집이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이 식당에서는 내가 직접 바에서 음식을 가져가야 했다. 주방장 아주머니가 바에 나와 나를 보며 "Chica!(얘!)"라고 부를 때마다 벌떡 일어나 음식을 가져왔다. "Señorita(아가씨)"가 아닌 "Chica"라고 불렸다는 사실에 괜히 나 혼자 친근감을 느끼기도 했다.


여유롭게 음식을 즐긴 뒤 바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하자, 주인아저씨가 내게 미소 지으며 "Todo bien?(맛있었어?)" 물어봤다. "Muy bien, gracias(엄청, 고마워)" 대답하며 이 나라 언어를 할 줄 알고 그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무척 행복했다. 인종으로서의 거리감이 허물어지며 언어의 장벽을 넘어 진심으로 소통하는 느낌이었달까. 아저씨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점심을 먹은 뒤에는 축제장으로 향했다. 화려한 전통의상들과 마차의 조화가 관광지에 왔음을 실감 나게 했다. 하지만 축제장 곳곳을 둘러보며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 나는 완전한 이방인의 입장으로 축제의 거리만을 즐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막 내부는 천막 주인에게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 내가 구경할 수 있는 건 외관뿐이었다. 비유하자면 수박 겉핥기 같은 느낌. 스페인 친구가 있었다면 흠뻑 빠져 축제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은 고이 접어두고 축제장을 마저 구경한 뒤엔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시장, 골목, 축제장을 걸어서 돌아다녔다 보니 슬슬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광장 옆에 공원이 있었다. 잠깐 쉬어가기 위해 공원으로 향해 돗자리를 펴고 마트에서 사 온 간식들을 꺼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는데 또다시 행복감에 고양되고 말았다. 파란 하늘 아래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들도 유난히 예뻐 보였다. 공원 한쪽에서는 마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마치 중세시대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동안은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행복했다면 이번에는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행위 자체가 행복하게 느껴졌다.


사실 공원에서 돗자리를 펴고 간식을 먹는 건 한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이 순간이 유난히 특별하게 다가왔을까? 아마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익명성, 하루를 온전히 내 마음대로 꾸려갈 수 있는 자유, 그로부터 오는 해방감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행복이 더욱 깊이 다가왔던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사소한 행복을 기대하며 여행을 떠나는 건 아닐까.


공원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엔 전날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언니들과 합류해 메트로폴 파라솔로 향했다. 거대한 버섯 모양의 건축물은 확실히 신기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기는 어려웠다. 간단히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온 뒤 언니들이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오는 동안 나는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낯선 도시의 저녁 공기를 맡으며 여유롭게 걸으니 이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는 시간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벤치에 앉아 언니들을 기다리는데, 에어팟이 그만 벤치 틈 사이로 빠지고 말았다. 에어팟을 꺼내려고 10분 넘게 끙끙댔지만 손도 닿지 않고 마땅한 도구도 없어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마침 언니들이 도착했고, 찡찡거리며 상황을 설명하자 한참 웃더니 도와주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역시나 쉽지 않은 에어팟 구출 작전. 손으로 꺼내보려 해도 닿지 않고, 나뭇가지나 카드로 밀어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실패를 거듭하자 언니들의 승부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나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언니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이내 근처 식당 테라스에서 포크를 한 개 들고 나타났다.


“야, 그거 도둑질이야!”


다른 언니가 빵 터지며 말했지만 룸메 언니는 이미 에어팟을 꺼낼 생각에만 사로잡힌 듯했다. 하지만 포크로도 역부족. 에어팟은 여전히 미끄러지기만 할 뿐 좀처럼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내가 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껌을 씹어 끈적하게 만든 뒤 팸플릿 끝에 붙여 조심스럽게 틈 사이로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정말 아주 천천히—끌어올리자, 드디어 에어팟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더럽지만 아주아주 뿌듯한 순간. 모두가 올림픽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박수치며 환호했고 그 덕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그치만 신나는 걸 어떡해!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충분히 누렸고 한참 뒤에야 호스텔로 돌아갔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에서는 항상 누군가 말을 걸거나,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자연스러웠는데 세비야에서는 이틀 내내 대부분 혼자였다. 그 덕에 이방인으로 도시를 거닐면서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은 채 오롯이 나만의 리듬대로 움직이는 하루. 어쩌면 이런 순간들을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계속하는지도 모르겠다.



keyword
이전 12화벤치에서의 1시간 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