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다에서 만난 사람들 02
기념품샵 아저씨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서는 누에보 다리로 향했다. 대부분의 한국인 관광객은 다리 위에서 사진만 찍고, 다리 아래까지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할 일도 없고 시간도 많아서 사진을 위한 삼각대까지 챙겨 다리 아래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내내 동양인도, 혼자인 사람도 나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등 뒤로 힐끔거리는 시선들도 느껴졌다.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척 태연히 풍경에 집중하며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눈앞에 꽤 가파른 비탈길이 나타났다. 내려가도 되는 건지 망설이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별 고민 없이 그 길로 쭉 내려가는 걸 보고 나도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힘겹게 도착해 만난 풍경은 예상과 달리 위에서 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망이 몰려오는 한편 체력도 함께 바닥났다. 그 가파른 등산길을 다시 올라갈 엄두가 차마 나지 않았다. 마침 근처에 주차장이 있었고, 근처에 사람들도 몇 명 보였다. 정말 아무나 붙잡고 나 좀 시내까지 태워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꽤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그럴 용기까지는 나지 않아 마음을 다잡고 다시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
힘들었던 등산을 마치고 시내로 돌아오니 제일 먼저 띤또가 생각났다. 갈증과 피로를 단숨에 해소해 줄 빨갛고 달콤한 띤또. 길을 걷다 보이는 아무 바나 들어가 음료를 주문하려 하니, 메뉴판은 따로 없고 원하는 음료를 말하면 만들어주는 방식이었다. 이런 커스텀 바 비싸지 않나? 가격이 걱정됐지만 이미 들어온 이상 다시 나갈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띤또와 함께 물을 주문했다.
'비싸면 그만큼 값어치를 하면 되지'라고 합리화를 하며 땀을 식히고 일기도 쓰고 멍도 때리면서 쉬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 슬슬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바에 가서 계산하려고 하니, 영수증엔 평범한 띤또와 물 가격이 적혀 있었다. 나 왜 걱정한 거지? 지레짐작으로 괜히 겁부터 먹은 내 자신이 웃겼다.
갈증이 가시니 이젠 달콤한 게 땡겼다. 다음 목표는 젤라또! 시내를 조금 걷다 보니 멀지 않은 거리에 젤라또 가게가 두 곳 보였다. 메뉴를 각각 살펴보니 한 집에서만 피스타치오 맛을 판매하고 있었다. 야오야오에서 먹었던 맛을 기대하며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그 깊고 진한 맛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젤라또를 먹으며 또다시 길거리를 배회하는데, 이번엔 웬 노부부가 말을 걸어왔다.
“Disculpe, ¿dónde compraste eso?(실례합니다, 젤라또 어디서 사셨어요?)”
내가 먹고 있던 젤라또가 맛있어 보였는지, 내가 먹고 있는 젤라또를 가리키며 어디서 샀냐고 스페인어로 물어본 것. 아마 다른 도시에서 온 스페인 여행객 같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누가 봐도 동양인인 나한테 스페인어로 질문하다니 또다시 스페인 사람들의 대담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마 성공확률이 높아서 그런 거 아닐까? 스페인어로 질문했을 때 사람들이 알아들은 게 절반 이상의 확률은 되는 거지(지금의 나처럼). 어쩌면 경험에 근거한 자신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느 정도 그들이 이해가 됐다.
어찌 됐든 젤라또 가게는 알려줘야 했다. 서툰 스페인어로 길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가게가 멀지도 않았기에 “Solo sígame(그냥 저 따라오세요)”하며 젤라또 집까지 직접 그들을 데려다줬다. “Gracias(고마워요)!”하며 젤라또를 먹을 생각에 들뜬 모습이 귀여워 보여 나도 웃음이 났다.
노부부를 배웅하고 난 뒤, 저녁은 식당에서 먹을지 숙소에서 먹을지 고민했다. 식당에서 먹는다면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숙소에서 먹는다면 식사가 조금 빈약한 대신 누에보 다리의 멋진 뷰를 안주 삼아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 숙소를 선택한 이유를 떠올리고(멋진 뷰), 숙소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마트에서 빵, 치즈, 하몽, 맥주 등 간단한 주전부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을 땐 때맞춰 주황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정말 완벽했다. 유럽에서 봤던 노을 중 손에 꼽게 아름다웠다. 낮에 할머니와 대화했던 테라스 의자에 앉아 노을 속 누에보다리를 감상하며 저녁을 먹는데 문득 감정이 몰려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다.
여행을 시작한지 2주가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혼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지인들이 가장 많이 걱정했던 건 치안과 외로움이었다. 평소에도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 편이라 치안은 몰라도 외로움은 전혀 걱정하지 말라며 큰 소리를 치고 왔는데 외로움을 느낀 스스로가 신기했다. 하루종일 혼자였던 것도 아닌데.
아마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데, 그 풍경을 보고 함께 감상하고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론다에서는 의외로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 대부분은 일행이 있었다. 특히 오후 내내 홀로 등산하며 내심 그들이 부러웠나보다. 힘듦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게. 혹은 세비야에서부터 이어진 혼자만의 시간이 누적되어 드러난 감정일지도.
여러 감정이 겹쳐진 순간이었다. 외로움을 털어내는 데는 잠이 특효약이지. 감정에 더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해 서둘러 저녁을 정리한 뒤 씻고 침대에 누웠다. 말라가에서는 식사할 때만이라도 동행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쓸쓸히 론다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