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에서 만난 사람들 01
말라가로 떠나는 날 아침. 전날 일찍 잠들었는데도 피로가 많이 쌓였는지 좀처럼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터미널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예매해 두었기에 지체할 새가 없었다. 서둘러 비타민을 입에 털어 넣고 무거운 몸을 이끌어 터미널로 향했다.
론다에서 말라가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말라가에 도착한 건 정오쯤. 이곳에서도 TOC 호스텔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해 얼리 체크인이 가능하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No". 어쩔 수 없이 짐만 맡겨두고 점심을 먹기 위해 호스텔을 나섰다.
딱히 정해둔 식당은 없었기에, 그냥 호스텔 근처에서 테라스가 있는 식당을 찾았다. 사람이 꽤 앉아있어 괜찮아 보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테라스 자리에 앉았는데, 날 응대하러 온 사장님의 외모가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봤더라 했더니 전날 론다에서 만난 식당 사장님과 묘하게 닮아있었다. 약간⋯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개성 강한 인상이랄까. 스페인 남부 아저씨들이 가진 분위기인가.
음식은 주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놓인 건 종류만 다른 크로켓 두 개. 알고 보니 내가 주문을 잘못한 거였다. 어쩐지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라. 이미 주문한 거 어쩌겠어. 기대 없이 크게 한 입 베어문 크로켓은 다행히도 꽤 맛있었다. 바삭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가 기억난다. 다만 두 크로켓 간 맛의 차이가 크지는 않아 절반쯤 먹었을 때는 살짝 물리기 시작했고, 띤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마무리했다.
점심을 먹었는데도 체크인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 남아있었다. 특별히 정해둔 계획도 없던 터라 골목을 따라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항구에 도착했다.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고, 항구를 바라보는 맞은편에는 플리마켓이 쭉 줄지어 서있었다. 플리마켓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체크인까지는 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계획을 좀 짜고 올 걸 그랬나?
걷다 보니 마침 조그만 공원이 나왔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벤치에 앉아서 쉬다 보니 잠이 쏟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론다에서 여유롭게 준비하고 나와서 11시 버스 탈 걸.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감겨가는 눈을 붙잡으며 잠깐 고민하다 결국 또다시 벤치에 눕고 말았다. 한 번 누우니 그다음은 쉬웠다.
이번에도 가방을 꼭 껴안은 채 잠에 들었고, 30분쯤 지나 비둘기가 푸드덕 거리며 바로 옆에 내려앉는 소리에 놀라며 잠에서 깼다. 너 나 깨워준 거니. 일어나 호스텔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어디서든 잘 자는 체질에 또 한 번 감사했다. 낯선 도시 한복판에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깬 것도. 벤치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여행객일 거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는 않겠지만.
호스텔에 도착해 체크인하고 간단한 짐 정리를 한 뒤에는 동행 카페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할 동행을 찾았다. 그간 혼자 부실하게 식사를 해결하느라 살이 많이 빠지기도 했고, 오랜만에 다양한 음식도 먹고 싶었고, 간만에 한국어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말라가는 한국인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 동행을 구하는 글이 없을까 걱정했는데(먼저 글을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오늘 저녁 동행을 구한다는 글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카톡을 보내 약속을 잡고 가뿐한 마음으로 호스텔을 나섰다.
호스텔을 나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야오야오. 피스타치오 맛 먹어야지! 조그만 광장에 앉아 야오야오를 단숨에 해치운 뒤 쓰레기를 버리려고 하는데, 도통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가지고 다녀야 하나? 귀찮은데.'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광장 앞 식당 직원이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끌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몰래 그를 주시하고 있으니 직원은 쓰레기통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어떤 기구(?)의 손잡이를 잡고 위로 올리더니 그 안에 쓰레기를 던져 넣었다.
아! 유럽 쓰레기통은 매립식이라고 했지! 그제야 스쳐 지나가듯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직원이 완전히 돌아가기를 기다린 뒤 나도 쓰레기통에 다가가 슬쩍 손잡이를 잡고 위로 올려보았다. 그 안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신기했다. 이렇게 또 하나 경험해 보는구나. 나도 야오야오 컵을 던져 넣고 가벼워진 두 손과 함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을 떠나 골목골목을 구경하고, 기념품샵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동행들과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함께 히브랄파로 성으로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었고, 식당 웨이팅이 있기도 할까 봐 조금 이른 5시에 약속을 잡았었다.
식당에 도착하니 다행히 웨이팅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어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웨이터를 불렀다. 수염을 멋지게 기른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하려고 하니 우리가 주문하려는 메뉴는 7시부터 주문이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메뉴를 먹으러 이 식당에 온 거였는데! 잠시 고민하다 다른 음식도 맛있겠지, 하며 가능한 메뉴들 중 추천을 받아 주문을 마쳤다.
이 모든 과정이 스페인어로 이뤄졌는데, 내가 떠듬떠듬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행들이 대단하다며 자꾸만 나를 추켜세워줬다. 살짝 머쓱하긴 했지만 사실 기분이 좋긴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게 늘 뿌듯하긴 했지만 이런 순간엔 유독 더 뿌듯한 법이다.
식사는 아주 맛있었다. 웨이터가 추천해 준 요리는 생선 요리였는데, 생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꽤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식사를 하면서는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화려한 패턴의 치마를 입은 여자분은 40대 초반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휴직을 내고 전 세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미 다녀온 나라들도 무척 많았다. 선생님이라 방학 기간을 활용해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었다고. 그중에서도 남미에서 있었던 아주 특별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는데, 듣는 내내 "진짜요? 대박!"을 반복해 외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국제적으로 수배된 범죄자와 이름이 동일하다는 이유로 남미 입국심사대에서 붙잡혀 경찰 취조까지 받았다는 것. 아무리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이름이 같고 얼굴도 닮았다며 확실히 아니라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보내줄 수 없다고 했단다. 무섭기도 하고 이대로 정말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 속이 타들어가는 찰나, 범죄자의 성별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본인은 여자인데, 범죄자는 남자였던 것이다! 재빨리 그 사실을 담당 취조관한테 말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이름이 동일한 건 둘째치고, 얼굴이 얼마나 닮았길래 성별이 다른데도 그 사람으로 오해를 했을까? “남미 사람들이 보기엔 동양인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서 그런 걸까요?” 물어보니 아니라고, 본인이 봐도 정말 닮아서 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며 웃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국제적인 범죄자와 같은 이름에 얼굴까지 닮을 수가 있다니! 때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수 있구나.
캡모자를 쓴 20대 초반의 남자는 동행 카페에 저녁을 함께 먹자는 글을 올려준 친구로, 영국에서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지내며 여행 중이라고 했다. 예산이 넉넉지 않아 도시마다 최대 2박을 넘기지 않는다고. 식사도 여러 명이서 먹으면 더 저렴하기에 자주 동행을 구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랑 비슷한 기간을 여행했음에도 훨씬 많은 도시를 다녀왔더라.
사실 나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럽에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행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도시를 가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시별로 최소 2박, 최대 4박을 머물렀던 건 그 도시의 분위기를 더 깊이 느껴보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 하루만 머문다면 주요 관광지만을 급하게 돌고 나올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결국 패키지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느슨하게, 마치 잠시 그곳에서 살아보는 듯한 마음으로 머물고 싶었다.
각자에 맞는 여행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나도 친구와 함께 왔다면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기보다는 각 관광지 앞에서 내 사진을 남기는 데에 더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많은 도시를 돌며 그만큼 많은 사진을 남기고 싶었겠지. 하지만 나는 혼자 왔고, 내 목적은 여유를 즐기는 것이었으며, 여행을 하는 내내 그 결정에 무척이나 만족했다.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혼자 여행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려 이제는 혼자여행을 더 선호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식사를 마친 뒤엔 야경을 감상하러 다함께 히브랄파로 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