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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놀랍게도 작게 느껴진 날

말라가에서 만난 사람들 02

by 진마리

히브랄파로 성으로 야경을 보러 가는 길, 유학생 친구가 길잡이를 자처했다. 낮에 이미 한 번 다녀온 길이라 잘 안다며, 투우장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 속으로 자신 있게 우리를 이끌었다.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도 잘 어울리는 풍경에 마음을 뺏긴 채 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전망대에 도착해 있었다.




전망대에 걸쳐 앉아 삼삼오오 모여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고향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행한 두 사람이 모두 대구 출신이었다. 동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반가워하던 그들은, 내친김에 동네까지 공유했고 곧이어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혹시 **고등학교 아세요? “

“어? 저 그 고등학교 나왔는데?”


이럴 수가 있나? 심지어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물론 졸업 연도는 약 20년 차이가 났지만, 이 시점에서 그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확률이라니. 세상이 좁아도 너무 좁은 거였다. 자꾸만 겹치는 우연들이, 이 커다란 지구가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우리 모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걸 실감하게 만들었다.


동향이라는 연결고리 덕에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지역 얘기, 학교 얘기 등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로 살짝은 들뜬 채 대화를 이어갔다. 나도 두 사람이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 성벽 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고,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하루가 그렇게 또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은 네르하와 프리힐리아나를 여행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구글맵을 보며 시내버스정류장으로 향했지만, 도통 정류장처럼 보이는 곳이 없었다. 한산한 거리엔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어 보였다. 고민 끝에 관공서처럼 보이는 건물로 들어가 서툰 스페인어로 말을 걸었다.


“Disculpe, ¿Dónde está la parada de autobús?”

("실례합니다, 혹시 버스 정류장이 어디인가요?")


그러자 경비원처럼 보이는, 머리가 살짝 벗겨진 아저씨가 아무 말 없이 나오더니 손가락으로 오른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 방향으로 가라는 건가. “Ah, gracias!” 감사인사를 건네니 아저씨는 시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들어가 간이의자에 앉았다.


아저씨가 가리킨 방향대로 길을 따라가니 나타난 버스정류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인파에 섞여 혹여나 버스가 정차하지 않고 떠날까 봐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버스를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사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네르하까지는 약 한 시간. 깜빡 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그새 네르하에 도착해 있었다.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 프리힐리아나에 도착한 뒤엔 제일 먼저 아침을 먹으러 카페로 향했다. 메뉴판을 확인하니 요거트도, 츄러스도, 커피도 모두 맛있어 보였다. 양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세 개를 모두 주문하니, 직원이 나를 흘끗 보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


“¿Tú solo?”

("너 혼자?")




으응… 왠지 머쓱했지만 혼자 먹는다고 하자, 직원은 알겠다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차례대로 음식이 나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맛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식사를 마무리하고 동네를 한 바퀴 구경한 뒤 다시 네르하로 돌아가려 하는데, 마을 초입에서 모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시 기다렸다 지나가려는데, 문득 떠오른 문장 하나.


“Puedo pasar?” ("지나가도 될까요?")

“Si, si” ("그럼요.")


그냥 지나가도 됐었지만 배운 걸 자연스럽게 써먹었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했다. 그렇게 작은 만족을 얻고 네르하로 돌아가는 버스 안, 뒤편에서 일본어가 들렸다. 일본인 관광객인가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치‘ 같은 단어도 들렸다. 아마도 한국인이랑 일본인이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신기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대충 흘려듣고는 별생각 없이 네르하에 도착해 바닷가로 향했다.




네르하는 유럽의 발코니라고 불리는, 바다가 예쁘기로 유명한 동네였다. 나도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꼭 남기고 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마침 동양인처럼 보이는 여자분이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사진을 부탁하니, 다행히 여성분도 한국인이었다! 서로 무척 반가워하며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이번엔 멀리서 웬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왔다.


알고 보니 둘은 내가 버스에서 엿들은 대화의 주인공들로, 아침에 네르하로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오늘 하루 동행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여자분이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알아 일본어로 소통하고 있다고. 어쩌다 보니 나까지 셋이 되어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아저씨는 일본어만 할 줄 아는 반면 나는 일본어를 하나도 못해서 소통이 쉽지 않았다.


함께 하는 내내 언니가 어느 정도 통역을 해줬지만,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고 결국 우린 그냥 젤라또나 먹기로 했다. 그렇게 나란히 벤치에 앉아 젤라또를 먹던 그 순간. 그저 아무 말 없이 풍경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이 참 평화롭고 좋았다. 즉석 동행이라. 꽤 낭만 있다고 느꼈다. 여행자들끼리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유대감이 분명 있는 것 같다.


함께 구경을 마친 뒤 일본인 아저씨와는 헤어지고, 언니는 먼저 말라가로 돌아갔다. 나는 조금 더 네르하에 머물다 말라가에서 저녁 7시에 저녁을 먹자고 약속한 채였다. 맛있는 걸 먹자며 내친김에 동행카페에서 또 다른 동행도 두 명 더 구해 넷이 되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식당에 도착하니 모두 도착해 있었다. 식당은 랍스터빠에야로 맛집으로 유명한 집이었다. 스페인에 와서 빠에야는 꼭 먹어봐야 한다는데, 대부분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해 그동안 먹어보지 못해 아쉬웠었다. 그런데 첫 빠에야가 무려 랍스터 빠에야라니! 그야말로 기대만발이었다.




기대감을 잔뜩 안고 먹은 빠에야는 정말, 정말! 맛있었다. 유럽을 여행하며 먹었던 음식 중에 제일이었다. 사실 여행하면서 굳이 맛집을 찾아다니지는 않았었는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맛집을 찾아다니는지 알 것 같던 순간이었다. 감탄하며 순식간에 접시를 비워낸 우리는 왠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해안가의 펍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펍에서는 자연스럽게 여행 이야기와 각자의 삶 이야기를 나누며 인스타그램도 교환했다.(이때는 인스타그램을 재활성화한 시기였다) 그런데 또 한 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일행 중 한 명과 내가 겹치는 인스타그램 친구가 있었던 것. 그 사람은 바로 내 고등학교 후배였는데, 알고 보니 둘은 대학교 동기였다! 세상이 이렇게 좁을 수가. 비록 둘 다 그 친구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유럽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겹지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할 일이었다.




이틀 연속, 세상이 참 좁다고 느끼게 된 말라가에서의 시간들. 낯선 도시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다 보니 정말 이 모든 우연이 우연이기만 한 걸까 싶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고, 여행은 그 인연을 발견하게 해주는 특별한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인연들이 마음을 움직이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말라가에서의 시작은 장소보다 사람이, 풍경보다 순간이 더 또렷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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