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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해 나를 이해하는 법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사람들 01

by 진마리

말라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날 아침. 비행기 값을 아끼려고 아침 7시 출발 항공편을 예약했기에 새벽 5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서둘러 짐을 챙겨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하려던 순간 직원이 빠르게 스페인어로 말을 걸었다.


“Cual es tu número de cuarto?”

(“너 방 번호가 뭐야?”)


놀랍게도, 별다른 생각도 없이 내 입에서 스페인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Dos cero uno(201호).”

피곤에 지쳐 우버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문득 방금 상황을 곱씹게 됐다.


‘어? 나 방금 스페인어로 자연스럽게 대답했잖아?’


그 짧은 한마디였지만 내 귀가 조금은 트였다는 신호 같았다. 괜히 신이 나고 뿌듯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탑승 수속을 마치고 보딩을 기다리던 줄. 앞에 있던 두 여성이 무척 빠른 속도로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다. 호스텔에서는 대충 예상되는 문맥이라 알아들었던 거구나. 자만은 금물이라 되새기며 비행기에 올랐다.




바르셀로나의 첫인상은 ‘확실히 도시다’였다(당연한 말이지만). 유명한 관광 도시답게 사람도 많고, 건물들도 빽빽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호스텔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쯤. 체크인을 위해 간단한 스페인어로 예약 정보를 전하자 직원이 스페인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조금’이라고 대답하니, 이후 모든 설명이 스페인어로 이어졌다.


말라가 공항에서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긴장이 됐지만 다행히 천천히 말해준 덕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긴 설명이 끝나고 짐을 맡길 수 있는지 묻자, 시간당 요금을 내고 사물함에 보관할 수 있다고 했다. 여행 내내 짐 맡기는 데 돈을 받았던 도시는 바르셀로나가 처음이었다. 왠지 정 없다는 느낌에 살짝 서운했지만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사물함에 캐리어를 맡기고 요금을 결제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카페.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시장과 쇼핑몰을 둘러보다 보니 동행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됐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유명한 츄러스 가게, ‘츄레리아’. 한 세트를 시켜 나눠 먹기로 하고 줄을 서며 동행에게 “전 맛만 볼게요.”라고 말했다. 솔직히 지금껏 먹었던 스페인 츄러스들은 기름지고 느끼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첫 입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저 더 먹어야 될 것 같아요.” 한 입 베어문 뒤엔 바로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정말 담백하고 너무너무 맛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방금 전 한 말을 취소하는 게 약간 민망하긴 했지만 맛있는 걸 앞에 두고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츄러스 가게 옆에 나란히 서서 츄러스를 먹고 있으니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행 중 처음 만나는 비였다. 금방 그치겠지 싶어 근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지만 비는 점점 거세지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삼십 분. 결국 우리는 비 오는 길을 뛰기로 했다. 식당까지 전속력으로.



비를 맞으며 식당을 향해 뛰어가던 길


말라가에서는 분명 흐린 날씨에 기분이 가라앉았었는데 이상하게 바르셀로나의 비는 즐거웠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길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괜히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젖은 옷도, 젖은 머리카락도 마냥 유쾌하게 느껴졌다.


비에 흠뻑 젖어 도착한 식당은 빠에야가 유명한 집이었다. 어떤 메뉴를 고를지 고민하다가 여행도 얼마 남지 않았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아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차례대로 나오는 음식들을 맛보며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을 누렸다. 먹는 동안만큼은 마음도 여유로워졌다.



산 조르디의 날엔 연인이 서로에게 책과 장미를 선물한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둘째 날은 정해진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을 걸었다. 마침 ‘산 조르디의 날’이라 거리에는 장미와 책을 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변부터 공원, 시내 곳곳을 둘러봤지만 어쩐 일인지 기대만큼 인상 깊지 않았다.


스페인 하면 다들 바르셀로나부터 떠올릴 만큼,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도시라는데 그 말이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소문난 맛집의 꿀대구는 평범했고,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왠지 부산 해운대가 떠올랐다. 아직 가우디 투어를 안 해서일까? 바르셀로나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좋다는 말이 많았지만 내겐 어딘가 심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도쿄에서 느꼈던 감정이 떠올랐다.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아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던 도시. 생각해 보니 바르셀로나도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 나는 대도시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 건가. 색다른 풍경과 경험을 기대하며 떠난 여행에서 특별함을 찾지 못한다면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없는 법이다.



‘여행을 하면 나를 더 잘 알게 된다’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나는 어떤 걸 좋아하고,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인지— 그 모든 것이 이 낯선 도시에서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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