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사람들 02
바르셀로나에서의 세 번째 날이자 여행의 마지막 날. 화려한 마무리를 위해 가우디 투어를 예약해 두었다. 투어 이름은 '현지인 에두와 집중 가우디 산책'. 조금이라도 현지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내부까지 함께 동행가능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선택했다.
아침 일찍 미팅 장소인 카페로 향하는 길. '산 조르디의 날'이었던 전날의 여운을 보여주듯 거리 곳곳에서 장미가 보였다. 기분 좋게 거리를 구경하며 카페에 도착했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투어가 시작됐다. 혼자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대부분은 신혼부부였고, 어린 아들과 함께 온 어머니도 보였다.
혼자 온 덕분에 줄곧 가이드님 옆자리를 꿰찰 수 있었고, 이동하는 길에는 종종 스페인어로 말을 걸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바르셀로나 - 가우디 = 0'이라더니 건축 지식이 거의 없는 내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인상적인 순간들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건 구엘공원이었는데, 투어가 아니었다면 공원에서만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을 것 같았다. 알록달록한 색감과 유려한 곡선들의 조화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엔 다 함께 점심을 먹고 사그리아 파밀리아 성당 관람까지 마치며 투어가 마무리됐다. 사실 투어하면서 가이드님이 꽤 한국인 같다는 느낌을 몇 번 받았는데, 알고 보니 한국에서 몇 년간 거주한 경험도 있고 아내 분도 한국 분이시라고 했다. 그러자 문득 한국에 오시기 전 가이드님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도 궁금했고. 아쉽게도 가이드님은 아이들을 데리러 서둘러 떠나셨고, 그 이야기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됐다.
투어가 끝난 뒤에는 함께 했던 신혼부부 한 쌍과 모자 한 쌍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택시를 나눠 타고 벙커로 향했다. 다섯 시 이후에는 소음 문제로 입장이 불가하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시간 내 도착해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 홀로 벙커를 내려오던 길.
"한국인인가?"
누군가 내 옆을 지나가며 혼잣말처럼 던진 말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할아버지 한 분이 "한국인 맞지? 왠지 그런 것 같더라고" 하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이어서 근처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혹시 유학생이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그랬으면 정말 좋았을 테지만 아쉽게도 관광객이라고 답했다.
자연스레 이야기가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전쟁 직후, 무려 50년 전에 바르셀로나로 이민을 오셨다고 했다. 이곳에서 한인식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오셨고 지금은 아들이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이제 스페인어는 완벽하시겠어요"라고 웃으며 말하니, 할아버지도 "그냥 먹고살 만큼만 해~"라며 또 한 번 푸근하게 웃어 보이셨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간 건 언제냐고 묻자, 스페인에 온 이후 딱 한 번 가봤는데 너무 많이 달라져서 그 이후론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더 이상 만날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약 10분가량 거리 한복판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할아버지도 나도 살짝은 들뜬 게 느껴져 즐거웠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할아버지는 장을 본 비닐봉지를 자랑하듯 흔들며, 이제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며 작별을 고하셨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교포 1세를 만나다니. 너무너무 신기했고 그 시간이 무척이나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무런 정보가 없던 시절 지구 반대편으로 이민을 오기로 결심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을 기대하며 왔을까. 그 기대를 이루셨을까. 무엇보다, 행복하셨을까?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여운이 길게 남았다. 여행 마지막 날, 여행을 시작하며 기대했던 답의 한 조각을 어렴풋이 얻은 것도 같았다. 같은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길을 개척한 사람을 만나고 나니 삶에는 정해진 방식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닿았다.
그러나.
2024년 4월, 홀로 자유롭게 유럽을 누비던 나는 1년 뒤인 2025년 4월, 사람들 사이에 떠밀려 강남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리라 포부 넘치게 문을 박차고 나왔건만 또다시 현실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회사에서 9시간, 대중교통에서 2시간. 밥을 먹고 치우고 씻고 또 다음날 출근을 준비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 중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
나는 왜 또다시 톱니바퀴가 되기를 택했나.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왜 또 불안에 못 이겨 취업을 선택했나. 왜 또다시 행복을 미래로 미뤄두며 현재를 견디고 있나.
내 안에는 늘 이방인으로 지내고픈 마음이 있다.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픈 마음. 목적 없이 거리를 헤매고, 아무 데나 앉아 햇살을 즐기고픈 마음. 그런 마음들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꾹꾹 눌러 담은 채 다시 수많은 인파 속 한 사람이 되기를 택할 때면 코 끝이 찡해지며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여행을 꿈꾼다. 이번엔 짧은 휴식이 아니라 아예 잠시 삶을 옮겨두는 쪽에 가까웠으면 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生)을 즐기기 위해 떠나고 싶다. 여행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보다 더 자유로울 나를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