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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걸

말라가에서 만난 사람들 03

by 진마리

말라가에서의 세 번째 날. 원래 계획은 그라나다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서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오는 것이었지만,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표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전날에서야 알게 됐다.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내 실수였다.


무척 아쉬웠지만 스페인 남부에 다시 와야 할 명분이 생겼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남은 이틀을 말라가에서 여유롭게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날씨가 영 꾸리꾸리했다. 시장 구경, 점심, 디저트까지 해치우고 난 뒤에도 날씨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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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기분도 날씨처럼 꾸물꾸물해졌다. 무얼 하면 좋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말라가에서 선셋 보트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발견했다. 곧장 바닷가로 향해 저녁 7시 30분 티켓을 예매한 뒤, 하늘이 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일단 호스텔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호스텔에서 쉬면서는 간만에 부모님이랑 영상통화도 하고, 일기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도 영 기분이 나아지지 않고 더 처지기만 했다. 한국에서는 하루종일도 잘만 누워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잠깐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었다.


단지 날씨가 흐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분이 가라앉다니. 알함브라 궁전을 미리 예매하지 않은 게 후회됐고 궁전을 못 보더라도 그라나다에 다녀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간 여행 내내 비가 오지 않았던 걸 감사히 여겨야 할걸 알면서도 흐린 날씨는 내 감정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래, 이럴 땐 환기가 필요하다. 잠깐 눈을 붙였다 나가자. 재빨리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건 오후 5시 30분. 보트 탑승시간은 7시부터였다. 보트에 타기 전 간단한 간식을 사기로 하고 마트에 들렀다. 밖으로 나서니 다행히 하늘도 조금씩 개고 있었다. 어쩌면 선셋을 볼 수 있지도 않을까?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토마토와 음료수를 구매해 보트에 올랐다.



FEDA0421-E111-4E69-A407-6D2959A6F7E9_1_102_a.jpeg 바다에서 바라본 말라가 풍경


보트에 타니 아쉽게도 구름이 다시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했고, 해가 사라지며 하늘은 다시 회색으로 뒤덮였다. 근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함께 보트에 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행복해졌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날씨와 관계없이 그저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번뜩 모든 건 정말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불평불만을 하기보다는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는, 바로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되는 거였는데. 쌀쌀한 바람에 으슬으슬 떨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행복 별 거 아니네!


성공적으로 보트투어를 마무리한 다음 날. 아쉽게도 또 날이 흐렸다. 숙소 근처 브런치 집에서 아사이 볼을 천천히 먹으며, 오늘 하루 뭘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원래는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한 바퀴 돌 생각이었지만 흐린 날씨와 생각보다 찬 공기가 나를 망설이게 했다.


결국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뚜렷한 계획 없이 말라게타 해변으로 향하던 길.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별생각 없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그냥 탈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대개는 한 일보다는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하곤 하니까. 한 번 결심하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곧장 구글맵에서 가까운 자전거 대여점을 찾아 들어갔고, 예쁜 하늘색 자전거를 빌렸다. 다른 평범한 자전거보다 값이 더 비쌌지만 나를 위해 이 정도는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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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할아버지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자전거 도로를 따라 페달을 밟던 그 순간.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자유로운 기분. 해방된 기분. (무엇으로부터?) 막상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니 날씨와 추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개기 시작했다. 화창한 햇살 아래 말라가의 해변은 정말 아름다웠다. 푸른 바다와 그 앞에 삼삼오오 모여 태양을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옆을 쌩쌩 달리는 나. 힘든 줄도 모르고 그냥 계속 페달을 막 막 밟았다.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은 El dedo 해변.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스며들던 그곳에 마침 바닷가를 마주한 활기찬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긴 여정 끝에 갈증이 몰려오기도 했고,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풍경이었다. 식당 안은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활기차고 정겨운 분위기였다. 웨이터들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다니며 메뉴를 외치면 먹고 싶은 사람이 손을 드는 시스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다가 웨이터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나도 슬쩍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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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들고 다니며 주문 받는 웨이터들


곧이어 내 앞에 놓인 디저트 한 접시와 칵테일 한 잔. 달콤한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며, 멍하니 신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 자전거 타길 참 잘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계산을 하려던 찰나, 영수증에 찍힌 금액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17유로(27,000원)라고? 생각보다 비쌌지만 이상하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순간의 분위기와 낭만까지 함께 계산서에 포함된 느낌이었달까.


원래는 여기까지만 둘러보고 돌아가려고 했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발목을 잡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조금만 더 가보기로 하고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이어진 길 위에서 만났던 수많은 풍경과 사람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드넓은 모래사장 한가운데 홀로 누워 책을 읽던 할머니, 나란히 앉아 파도소리를 감상하던 노부부, 내게 귀여운 강아지를 자랑하던 아주머니, 사진을 부탁하자 쿨하게 찍어주고 떠난 스페인 단체 관광객까지. 그 모든 풍경이 따뜻하고 인상 깊었다.



A67927A6-72C5-4AD4-A911-7274DFD53C96_1_102_a.jpeg El Palo 해변에서


만족감을 가득 안고 자전거 가게로 돌아가는 길엔 뜻밖의 일의 생겼다. 바로 트래블월렛 카드를 잃어버린 것. 자전거 대여점에서 카드로 결제했던 보증금을 환불받으려면 실물 카드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대로 내 보증금 날리는 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묘책이 떠올랐다. 돌려받아야 할 50유로에서 10유로를 뺀 40유로 만을 현금으로 돌려받겠다고 하자, 주인 할아버지도 흔쾌히 현금 40유로를 건네주었다.


분명 속상하고 짜증이 나야 맞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이 정도의 손해쯤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자전거를 타는 내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해변을 따라 달리던 그 세 시간. 바람을 가르고 바다를 마주하며 느꼈던 자유로움. 그 모든 순간들이 너무도 소중하고 벅찼기에 결국 웃으며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행복했을까? 특별한 건 없었다. 날씨는 흐렸고, 계획은 틀어졌고, 작은 실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자유로웠는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은 하루 속에서 스스로에게 허락한 여유, 즉흥적인 결정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한 예상 밖의 기쁨들. 내 마음이 열린 만큼 세상도 나를 반겨준 것 같았다.


앞으로도 종종 이 날을 떠올릴 것 같다. 잔잔한 바다와 뜨거운 태양, 그리고 그 사이를 달리던 나. 그 모든 순간이 하나로 겹쳐질 때 문득 알게 됐다. 기분이란 건 결국 내가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익숙한 하루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는 걸. 결국, 모든 건 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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