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다에서 만난 사람들 01
세비야에서의 2박을 마치고 론다로 떠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체크아웃을 마친 뒤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 무렵 한적한 세비야 거리는 그만큼 더 아름다워 보였다. 아쉬움을 한 켠에 남겨둔 채로 터미널에 도착해 먼저 버스 탑승구를 찾았다. 내가 탈 버스는 론다행 10시 버스였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한국인처럼 보였다. 론다가 한국인한테 인기가 많긴 하구나, 실감하면서도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궁금하기도 했다.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서 있다 보니 버스가 도착했다. 이 버스가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하고 있으니,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 두 분이 “10시 론다 가는 버스 맞나요?”라며 말을 걸어왔다. “앗, 그런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니 아주머니들께서는 “짐 먼저 실어도 되겠죠?”라며 짐을 짐칸에 싣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짐을 실은 뒤 자물쇠를 걸고 대화를 이어갔다.
"자유여행 하시는 거에요?"
그러자 아주머니들은 "네 너무 힘들어요"하며 웃으셨다. 나는 "정말 대단하세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부모님 또래 나이로 보였기에 자연스레 부모님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함께하지 않으면 항상 패키지여행을 선택하는.
엄마아빠도 나랑 함께 자유여행을 다닐 때면 패키지여행보다 자유여행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하곤 했었다. 빽빽한 일정 탓에 아침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하지 않아도 되고, 자유롭게 하루를 계획해 골목골목까지 구경할 수도 있고, 투어 버스가 아닌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 그 나라를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키지여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건 아무래도 말도 안 통하는 해외에 둘만 다녀본 적이 없어서겠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부모님과 자유여행을 많이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 번 하고 있으니 그분들이 또다시 말을 걸었다.
"론다에서는 어디서 묵어요?"
하루만 묵을 예정이라 누에보 다리 뷰 호텔도 잠깐 고민했지만 너무 비싸 결국 호스텔을 예약했다고 대답하니, 그분들은 "비싸긴 하더라구요. 우리는 나이가 있으니 이제 편하게 여행하고 싶어서 호텔을 예약했어요."라며 웃으셨다. 여행 계획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둘 버스에 탑승하기 시작했고, 우리도 "즐거운 여행 되세요" 인사를 나누고 각자 자리에 앉았다.
론다에 도착하니 12시. 캐리어를 끌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스텔에 도착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호스텔을 예약할 당시 문이 잠겨있다면 전화를 달라던 안내가 떠올랐다. 진짜 잠겨있을 줄은 몰랐지! 나는 이심을 사용하고 있던 터라 통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금 기다리면 오겠지, 하며 문 앞에 철푸덕 앉아 주인 분을 기다렸지만 20분이 지나도 주인 분은 올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용기를 내어 바로 옆에 있던 식당에 들어갔다.
“Hola(안녕)”
“Hola, ¿puedo usar el teléfono?(안녕,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
식당에 들어가 종업원에게 바로 옆 호스텔에 묵을 예정인데 문이 닫혀 있다고, 주인과 통화해야 하는데 혹시 전화기를 빌릴 수 있냐고 물었다. 가게 전화기를 빌릴 요량으로 들어간 거였는데 종업원은 흔쾌히 자기 핸드폰을 꺼내서 통화 창을 띄워주었다.
"Muchas gracias(정말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네고 통화를 걸자 다행히 주인 분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고, 5분 뒤에 도착한다고 알려왔다. 빠르게 통화를 마친 뒤 핸드폰을 돌려주며 다시 한번 "Gracias(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넸고 직원은 "De nada(천만에)" 라며 쿨하게 웃어 보였다.
낯선 타인에게 이토록 친절한 베풂이라니. 나도 한국에서 외국인을 만난다면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주리라. 식당에서 나와 다시 호스텔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호스텔 앞으로 다가와 휘휘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그 손짓에 따라 문 앞에서 비켜 할머니 옆에 서자 할머니는 문을 열고 이젠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이번에도 할머니 손짓에 따라 호스텔 내부로 들어갔고, 할머니는 "Passport(여권)"이라며 영어로 여권을 달라고 하셨다.
“Aquí tiene(여기요)”
“¿Hablas español?(스페인어 할 줄 알아?)”
“Sí, un poco(네, 조금요)”
여권을 달라는 말에 스페인어로 대답했더니 할머니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스페인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봤다. 조금 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자연스레 이후 대화는 전부 스페인어로 이어졌다. 예약 정보를 확인한 뒤 방으로 안내받는 동안 열쇠로 문을 여는 법, 화장실과 방 위치, 창문 여는 법 등등 온갖 스페인어가 쏟아졌다. 대화를 놓칠세라 대충 들리는 단어들로 내용을 유추하며 마치 듣기 평가하듯 귀를 곤두세우니 머지않아 숙소 소개가 끝났다. 할머니는 정리하고 있으라며 방을 나갔고 나도 마저 짐을 풀고 방 구경을 시작했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은 누에보 다리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창문을 열면 무려 침대에 누워서 누에보 다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숙소 상태에 대해 부정적인 후기가 많아 걱정했는데, 숙소 컨디션도 기대 이상이었다. 호텔에 묵을 필요가 없었잖아! 방 구경을 마친 뒤엔 누에보 다리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에서는 할머니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
“¿De dónde eres?(어디서 왔어?)”
“Soy de Corea(한국이요)”
“¿Sur?(남쪽?)”
“Claro(물론이죠)”
할머니가 먼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걸었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에서 스페인까지 비행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셨다. 보통 12시간 이상 걸린다고 대답하자 "그래서 너만 한 애들이 자기 몸집보다 큰 배낭을 메고 다니는구나" 하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스페인 어디를 다녀왔는지, 이젠 어디를 갈 건지도 물어보고 요즘 론다에 한국인이 정말 많이 온다는 이야기도 나눴는데, 대화하는 내내 상대방의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느껴졌다.
물론 모든 대화가 수월했던 건 아니었다. 대화 중 내가 어떤 단어를 못 알아듣자 할머니는 다시 쉽게 설명해 주려고 한참을 고민하셨는데, 결국 그냥 웃으며 넘어가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시간이 참 좋았던 것 같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현지인 할머니와 나누는 대화가 무척 따뜻하고 소중했다. 즐겁게 대화를 마무리한 뒤엔 방에서 잠깐 쉬다가 점심을 먹으러 호스텔을 나섰다.
론다에서의 점심은 구글맵에 의존하지 않고, 지나가다가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보이면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식당을 찾아 테라스에 앉자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생긴 주인아저씨가 환하게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오셨다. 스페인 남부 사람들은 전형적인 서양인 이미지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어쨌거나 메뉴판을 살펴본 뒤 오징어튀김과 콜라를 주문하자 주인아저씨가 "¿Quiere pan con ajo?(마늘빵도 줄까?)"하고 물어보셨다. 잠시 고민하다 마늘빵도 함께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늘빵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별 기대 없이 한 입 베어문 마늘빵은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이어서 나온 오징어튀김도 지금까지 먹어본 오징어튀김 중 최고였고. 후기를 보지 않고 들어온 식당이 이렇게 성공적이라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식사를 마치고 누에보 다리로 향하는 길에는 기념품 샵에서 마음에 드는 팔찌를 발견했다. 샵에 들어가 "Quiero esta pulsera(이 팔찌 주세요)"라고 말하자 이번에도 주인아저씨가 "Do you speak Spanish?(스페인어 해?)"하며 영어로 물어오셨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내가 스페인어를 해도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신기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확실히 론다가 시골이긴 한가보다 싶었다. "Sí, un poco(네, 조금요)" 하며 스페인어로 대답하고 계산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아저씨가 "Where are you from?(어디서 왔어?)"하며 또다시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Soy de Corea(한국이요)”
“South or North?(남쪽 아니면 북쪽?)”
“Sur, por supuesto(당연히 남쪽이죠)”
데자뷰같은 대화가 반복되는 한편 스페인 사람인 아저씨는 영어로, 한국인인 나는 스페인어로 대답하는 웃긴 상황이 연출됐다. 계산을 마친 후 가게를 나서며 "Gracias, tenga buen día(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며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아저씨도 "Tú también(너도)" 하며 스페인어로 대답해 주었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느끼지만 우리나라만 유독 휴전국가라는 인식을 덜 갖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K-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사실 남한에서 왔는지, 북한에서 왔는지도 꼭 물어보곤 한다. '김정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냐'는 질문도 종종 받곤 했고. 그럴 때마다 '한국이 휴전국가라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한 이슈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일상에서 그 얘기를 잘 꺼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대답하곤 했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 자국민보다 타국민이 더 관심이 많은 아이러니라니. 내가 죽기 전에 휴전이라도 끝나 완전한 종전 상태가 되고, 통일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세계 전쟁이 끝나는 게 우선순위겠다. 21세기에도 전쟁이 여전히 존재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욕심에 눈이 멀어 무의미한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가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