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보다 값지고 눈부신 미완의 작업물.
예술가는 완성된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예술가를 완성시키는 건 수십 번 고쳐 쓴 습작이다. 뭐든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3월,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막막한 이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줄 만한 동시대 창작자들의 습작을 엮었다. 걸작보다 값지고 눈부신 미완의 작업물.
⬆️싱글즈닷컴에서 기사 본문을 만나보세요⬆️
하나의 콘셉트를 세우고, 그걸 컷에 담기 위한 구체적인 재료와 구성으로 물질 공간을 축조해나가는 거죠. - @pakbae
매달 치열한 마감에 시달리는 패션 포토그래퍼지만 개인 작업도 정말 꾸준히 하는 사진 작가예요. 이렇게 계속해 자신만의 창작을 이어가는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브랜드나 매거진의 요청으로 촬영하는 작업물에도 제 스타일을 담을 수 있지만, 그런 상업 촬영만 하다 보면 제 사진에 정체성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개인 작업물을 완성하겠단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해요. 개인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를 찾고 시안을 만들고 그걸 시각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프롭을 설계하고 또 사진적으로 연출하는 과정을 거치면, 제 정체성이나 자아가 좀더 또렷해지고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거든요.
박성배 포토그래퍼의 사진에서는 어딘가 고전적이고 연극적인 질감이 느껴져요.
1세대 패션 포토그래퍼이기도 한 리처드 아베돈의 스타일에 많은 영감을 얻어요.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패션 사진을 보면 굉장히 클래식하거든요. 지금은 사진이 디지털 파일로 저장돼 쉽게 수정할 수 있고 여러 컷의 좋은 소스들을 합성할 수 있지만 옛날엔 사진이 필름 형식으로 저장돼 딱 하나의 A컷을 건져야 했어요. 필름 비용 때문에 지금처럼 빠르게 셔터를 누를 수도 없었고 한 컷을 찍는 데에 좀더 신중한 연출이 필요했죠. 그래서 포즈도 모델에게 맡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사진가가 손끝, 발끝, 머리 각도 등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디렉션을 줬죠. 제가 처음에 필름으로 사진을 시작해서 그런지 아주 구조적으로 계획되고 연출된 사진들에 끌려요. 그런 것들을 제 스타일로 많이 흡수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 연극적인 연출도 나타나지만 색채 대비도 강렬하거든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노란색의 따뜻함에 끌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저도 개인 작업을 할 때 노란색이나 빨간색을 많이 사용해요. 그리고 그런 강렬한 원색의 색채 팔레트와 명확한 대비에 매력을 느끼는 건 제 눈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제가 적녹색약이 약간 있어서 옅은 빨강이나 녹색은 구분이 어렵거든요.
사물을 보는 그런 오묘한 차이 때문인지 작가가 사용하는 색상 조합이 더욱 원초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개인 작업 중 하나의 시안을 습작 노트로 공개해주었죠. 어떤 과정으로 시안을 완성할까요?
먼저 단순히 끌린다거나, 다시 재현하거나 재해석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 레퍼런스를 최대한 많이 찾는 것에서 시작해요. 제가 모으는 시각 자료 중에는 클래식한 패션 사진도 많고 고전적이거나 그로테스크한 미술 작품도 많아요. 전달드린 시안은 ‘프리라파엘’ 사조의 미술 작품을 오마주한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에요. 일단 레퍼런스 사진이 어느 정도 모이면 제 감각대로 연결해 하나의 콘셉트를 세우고, 그걸 컷에 담기 위한 구체적인 재료와 구성으로 물질 공간을 축조해나가는 거죠. 시안을 완성하기까지 한 호흡으로 완성하는 건 아니고요. 거의 한달동안 컷 구성이나 연출 부분 등을 수시로 바꾸고 새로 고쳐나가요. 촬영하면서 좀더 즉흥적으로 발전시키는 지점도 분명 있어요.
최근에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꽃을 활용한 개인 작업이 많아요.
맞아요. 요즘에는 원이나 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요소가 강렬한 색조 대비로 이루어져 있는 단순한 그림들을 모으기 시작했거든요. 처음엔 우연히 시작하게 됐어요. 촬영 배경지로 쓰고 남은 색지들을 오리고 배치하다가 제가 많이 사용하는 재료인 꽃을 넣어본 거죠. 그러다 꽃을 사람으로 치환시키기도 했어요. 색지나 꽃이 반복적으로 들어가고 그걸 사람에게까지 확대한 작업은 당분간 계속 이어갈 생각이에요. 또 옛날 패션 사진들을 오마주해 명확한 포즈 디렉션이 들어간 사진도 꾸준히 연구해볼 계획입니다.
작가의 창작물은 습작을 바탕으로 완성되지만, 완성된 작품 역시 자기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습작의 연장선 같기도 하네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많은 개인 작업을 했고, 또 할 때마다 스타일을 정말 많이 바꾸었어요. 예전엔 다큐멘터리 형식의 인물 사진을 많이 찍었어요. 한 동네에서 일반인들을 섭외해 50명 가까이 찍은 적도 있고 모로코 마라케시의 제마 엘프나 광장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나 상인을 쫓아다니며 카메라에 담기도 했고요. 또 파격적인 사진으로 유명한 아라키 노부요시가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을 찍은 잔잔하고 관능적인 작품들에 영감을 받아 한 1년 반 동안은 스위스 그랜드 호텔의 객실에서 매번 다른 여성의 인물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하이퍼리얼리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과 고도로 통제된 환경 속에서 연출가가 개입한 사진 두 가지에 모두 매력을 느끼면서 작업을 해왔던 것 같아요.
모든 습작이 꼭 어떤 완성품에 귀결될 필요는 없지만 습작들을 통해 작가가 이루고 싶은 건요?
언젠가 개인 작업들을 모은 사진집을 내고 싶어요. 물론 지금도 물리적으로는 할 수 있지만 책으로 남길 만큼 자신 있고 내 정체성이라 확신이 드는 작업물을 꾸준하게 쌓아가는 게 목표예요.
*아래 콘텐츠 클릭하고 싱글즈 웹사이트 본문 확인!
▶ 습작의 기억 - <하이퍼나이프> 감독 김정현
▶ 습작의 기억 - 말총공예가 정다혜
▶ 자크뮈스가 15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