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사랑의 손 맛

by 마부자


금주 131일째, 아침 햇살은 초여름의 날카로운 빛이지만, 창밖에서 부는 바람은 늦봄의 날카로운 차가움이 공존하는 아침이었다.


제목: 멀리 내가 한숨 쉬고 있을 때 저도 한숨 쉬고 있으리 꽃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울고 있을 때 저도 울고 있으리 달을 보며 생각한다 내가 그리운 마음일 때 저도 그리운 마음이리 별을 보며 생각한다 너는 지금 거기 나는 지금 여기.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셔 - 나태주


몇 달 전, 올해는 4월부터 더위가 시작되어 11월까지 이어질 거라는 예보를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날씨란 결국 인간의 계산을 비웃기 위해 존재하는 듯 하루에도 몇 번씩 태도를 바꾼다.


그제 저녁 외식을 위해 집을 나설 때 꺼내 입은 옷도 겨울 끝자락에 밀어 넣었던 후리스였다. 서랍 깊숙이 접어 넣으며, 다시 꺼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옷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계절은, 봄이면서도 겨울의 아쉬움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제와 어제 저녁, 오랜만에 딸과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밤이 늦어졌다. 평소 루틴보다 늦게 잠이 들었고 아침은 평소보다 늦게 찾아왔다. 늘 하던 창가에서의 사색과 짧은 명상을 생략하고,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루틴을 찾아 책을 펼치기로 했다. 꾸준히 읽으려 애쓰고 있는 세계문학 가운데 이번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은 제목만 익숙했을 뿐 내용은 전혀 몰랐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쳤을 법한 이야기였을 텐데 나만 그 세계를 놓치고 살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 이 책에 대해 어떤 감상도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소년의 이야기일까 하는 막연한 상상만이 머릿속을 스친다.


세계문학전집을 손에 들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열세 권째.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도 낯설며 한 권을 넘길 때마다 나의 무지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는 이 반복적인 행위 속에서 나는 조금씩 미지의 세계와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있다.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다 느껴지는 오늘 아침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고 재치 있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어린 소년 톰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었다. 그의 엉뚱한 상상력과 무모할 정도의 용기는 어른이 된 내가 잊고 살던 시간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넘기며 조용히 웃고 있던 찰나, 거실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아내와 딸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나는 조용히 잠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우선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다행이 어제는 잘 주무셨다고 했다. 목소리도 다시 밝아 지셨다.


점심은 세 식구가 함께했다. 오랜만에 만둣국을 끓여주었다. 딸은 저녁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옷차림을 정리했고 나는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의식처럼 키를 들고 함께 내려와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집을 나서기 전, 며칠 전 어머니가 보내주셨던 깍두기며 김, 작은 반찬 몇 가지를 아내가 조심스럽게 도시락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 손길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조그만 반찬통 하나에도 세월이 담겨 있고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걸.


부모가 된 자식을 생각하며 정성껏 다듬은 무에는 단지 손맛만이 아니라 세월과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 무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러셨듯 그 안에는 기다림과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오늘 하루 밥상 위의 반찬이 아니라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마음의 조각들이었다. 자식을 위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자식이 다시 또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보내는 깊은 마음.


자식이 자식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 조각의 무 속에는 어머니의 마음까지 스며 있었다.


이 작은 깍두기 하나에도 세대가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다. 또한 아무렇지 않게 꺼내 먹는 김 한 장에도 커다란 마음이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어머니의 손에서 누군가의 어머니의 손으로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사랑이란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딸을 집 앞에 내려주며 어제 건넸던 책 선물에 대해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딸은 오히려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만약 아빠가 골프나 다른 값비싼 취미를 가졌다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책을 좋아해줘서 다행이라며 앞으로도 이 취미를 오래오래 간직해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웃으며 전했다. 그 말에 나도 웃었고 딸도 웃었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딸의 세계도 이제는 내가 닿을 수 없는 속도로 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껴졌다. 나는 그저 바라보며 멀찍이 걸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 돌아오는 길, 조용한 운전석 안에서 문득 또 생각했다. 딸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지금 이토록 애정을 갖고 하고 있는 일이 단순한 취미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의지만으로는 부족할지 모른다. 규율을 정하고, 두려움에 기인한 게으름에서 벗어나고, 약해지려는 지배의식을 이겨내서 낮은 확률을 뚫고 내 목표를 달성하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깊이 스며들어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딸을 보내고 아내와 함께 천천히 산책을 나섰다. 자연스레 향한 곳은 인근의 연꽃습지였다. 아침 창가에 서 있을 땐 아직도 봄은 멀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오면 알 수 있었다. 봄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걸.

작년 가을 추수가 끝난 뒤 텅 비어 있던 논은 겨울 내내 차가운 돌덩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제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이 다시 논 위에 담기고 그 물 위를 자맥질하며 바삐 움직이는 오리의 머리가 봄의 속도를 말해주었다.


인근의 주말농장도 이미 제 할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고랑마다 가지런히 깔린 검정과 하얀 비닐 사이로 연두빛 새싹들이 자라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닿았고 그 손끝의 기다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증거였다.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늘 말했다. 언젠가는 우리도 주말농장 하나쯤 분양 받아보자고. 그렇게 몇 해를 넘겼고, 그 ‘언젠가’는 자꾸 뒤로 밀렸다. 그리고 결국, 2025년에도 그 언젠가는 또 미뤄지게 되었다.


계절은 늘 다시 돌아오지만, 사람의 다짐은 때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내년에는 꼭 한번 도전해보리라 아내와 다짐을 했다.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집이 아닌 이마트로 향하고 있다는 걸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특별히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마지막 횡단보도를 건너며 나란히 웃었고 그 웃음 하나로 우리는 오늘도 같은 방향을 선택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건, 하루하루 쌓인 일상의 루틴이 만들어낸 다정한 합의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일주일치 식재료를 준비했다. 계산을 마친 후, 양손에 무게를 나눠 든 채 집으로 향하는 길.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무게가 중량의 느낌보다는 체온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듯 했다.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아내의 가벼운 발걸음과 무거운 손,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런 일상이, 이런 작은 반복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 더 크고 더 극적이어야 행복이라고 믿어왔던 나날들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 속 나는 참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었구나 싶다. 격렬함 대신 안정이 기대 대신 익숙함이 주는 따뜻함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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