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일.책은 가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긴다.

by 마부자


금주 129일째, 어제보다 조금 편안한 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아침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운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창문을 스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몸을 창가로 이끌었다.


빗물들이 창을 타고 흐르듯 계절의 순간도 흐르고 있었다 .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마치 공기 전체가 눅눅한 감정으로 내려앉아 있는 아침. 천천히 호흡하며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히며 오늘을 시작했다.


제목: 나무

너의 허락도 없이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어버리고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뺏겨버리고
그 마음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바람 부는 들판 끝에 서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슬퍼하고 있다
나무되어 울고 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중에서 - 나태주


두 사람은 출근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그 뒷모습을 보며 평소와 다름없이 웃으며 배웅을 했다. 그리고 나도 외출을 준비했다. 최근 들어 목에 작게 자리를 잡은 존재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평일 아침임에도 병원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이름이 호명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책을 가져와서 휴게실에서 독서를 시작했다. 창밖에서 내리는 비소리와 함께 읽는 책도 나름 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의사는 붓기는 다소 가라앉았지만 앞으로 일주일은 더 지켜보자고 했다.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불확실함이 마음 한편으로 불편했다. 그럼에도 처음 병원 문을 들어섰을 때의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그런 날의 우울함이 스멀스멀 마음을 타고 올라오려 했지만, 그 순간 나는 다짐했다. 오늘은 이 빗소리조차 즐겁게 받아들이겠다고.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기분은 생각보다 훨씬 나아졌다.


의사가 당분간 무리한 운동을 삼가라고 했다. 나름대로 애써 만든 루틴이었기에 운동을 쉰다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건강이 우선이라는 당연한 말을 오늘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운동 대신 책상 앞에 앉았다.


덕분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완독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감정이 요동쳤다. 아이히만이라는 인간이 보여준 기만과 무책임, 600만 명의 생명이 그의 무표정한 명령 아래 사라졌다는 현실은 감정의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분노와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을 방어했지만 그 말 속에 담긴 비겁함은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를 단죄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보여준 정당성에 대한 판단 기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으로 각인되었다.


이 책의 더 자세한 사유는 그리고 남은 이야기에 더하기로 했다.


책을 다 읽고, 운동을 쉬기로 한 오후. 조용한 집 안에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베란다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 내리는 비에 물을 함께 주면 아랫집에 물이 떨어지는 일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히 창문을 열고, 물을 틀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내가 베란다로 나가는 틈을 타 후츄도 조용히 따라나왔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처럼 분무기를 들어 화분을 향해 물을 뿌린 순간, 베란다 끝에서 ‘캬악’ 하는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놀란 나는 재빨리 수도를 잠그고 고개를 돌렸다.


후츄는 이미 흠뻑 젖은 몸으로 구석에 웅크려서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마음과 그 모습이 너무 웃겼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혹시나 감기라도 걸리면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조용히 이름을 불렀지만, 녀석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황태깍두기 세 조각과 츄르 하나로 기분을 달래며 거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수건으로 조심히 몸을 닦아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꾹 참았다. 빨리 말려주기 위해서 드라이기를 꺼낼까 고민도 했지만, 작년 여름의 사건이 스쳤다. 1년 만에 샤워를 시키고 드라이기로 말리려던 어느 날, 놀란 후츄가 발톱을 세우며 달려든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 생긴 상처 자국이 내 팔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사건 이후 드라이기는 후츄와 나 사이에서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다. 보일러 온도를 살짝 높이고, 집 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에 수건을 깔아 후츄를 눕혀주었다. 다시는 눈을 마주쳐주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이 결국 이불을 파고들며 나를 힐끔 바라보는 순간, 속으로 안도했다.


물론 오늘도 후츄는 단 한 번도 내 무릎에 올라오지 않았다. 늘 그렇듯,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사이. 그래도 그 거리마저 익숙하고 좋았다. 살아있는 무엇과 감정을 나눈다는 것이 꼭 다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후츄는 늘 조용히 알려준다.


비가 그치지 않는 오후. 그렇게 책과 함께한 시간은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고 다시 일상을 이어갈 작은 힘을 얻게 해주었다. 운동을 쉬게 된 하루였지만 오히려 독서의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는 다행이자 감사였다.


저녁엔 작은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어버이날에 함께하지 못한 딸이 오늘 저녁을 사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며칠전 결기와 오늘 어버이날을 함께 묶어 거하게 산다는 말에 미안하지만 당당한 마음으로 인근 한우집으로 향했다.


비록 혼자 자취하며 생활비 걱정은 덜하겠지만, 아직 사회 초년생인 딸이 적은 월급 속에서도 이런 날을 챙겨주겠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많은 우선순위가 있을 딸의 월급 중에 우리 부부를 위한 작은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한 순간이었다.

딸이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책 세 권을 건넸다. 포장지도 없었고 특별한 말도 없었다. 다만 “이거 아빠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짧은 한마디가 전부였다.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시간을 선물하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데 시간이 들고 마음을 들여야 하고 무엇보다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고르기 어려운 것이 책이다.


어버이날이라는 이름은 조금 거창하지만, 딸의 손에 들려 있던 그 책들은 나를 향한 조용한 애정의 표시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사람은 알아듣게 되어 있다. 책은 가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긴다.


고기가 익는 소리와 함께 웃음이 테이블 위에 퍼졌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낸 것만으로도 어제의 무거운 감정은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식사를 마친 뒤 막내가 아이스크림을 사겠다고 했다. 자신의 용돈으로 어버이날을 기념하겠다는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네 사람은 인근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자리를 옮겼고, 저마다의 입맛대로 고른 달콤한 디저트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평범한 장면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함께 웃고, 함께 먹고, 함께 걷는 하루.


비가 내려서 좋았고, 이유가 어찌 되었든 책을 더 오래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웃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하루였다.


이 하루는 분명히 기억될 것이다. 작고 흔한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낸 하나의 온기 있는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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