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음악삼아 생각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읽으며 현실의 개념을 다시 잡는 시간을 보낸 오전이었다.


불투명 1차 창문을 열고 창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보며 눈과 귀로 새로운 책 한권의 담는다. 오늘은 책을 소개한 작가가 직접 출현해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한 인생강의 영상이었고 강사는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이며 최근 <아무튼 명언>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감정에 혼돈을 겪으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상담에서 그가 조언으로 사용했던 수많은 명언들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해석이 담긴 책이었다.


오늘 그의 영상 중에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은 다음이 이었고 그 중 “걱정”이라는 단어에 잠시 영상을 멈추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적당한 걱정을 하는 겁니다.

적당한 걱정은 우리를 지켜 주는 면도 있습니다.
다만 그 걱정이 과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선 이 걱정은
보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한데
너무 걱정이 많은 것은
보험을 너무 많이 들고 있는 거 같은 것입니다.

많은 재무설계사가 적당한 수준의 보험료로
수입의 8퍼센트를 제시한다고 합니다.

즉 2백만 원을 버는 사람이라면
15만 원 정도가 적정하다는 것입다.

그렇다면 걱정도 그 정도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

하와이 대저택 제공 - 아무튼 명언 중에서

걱정.

저자의 보험에 대한 비유가 명확하고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재해에 대비하려고 여러 형태의 보험을 든다. 의료보험, 생명보험, 자동차보험처럼. 그런데 걱정까지 보험이라면, 내가 그동안 들고 있던 ‘걱정’이라는 보험은 과연 정당한 수준이었을까?


인간은 늘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 걱정 없는 하루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그건 인간만이 가진 특권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감정. 걱정은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대비하게 하는 정신의 면역 시스템이다.


그래서 걱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생존 본능이다. 불교에도 이런 말이 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 이 말은 걱정이 본질적으로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문제는 과한 걱정이다. 대부분의 걱정은 실체가 없다. 아직 오지 않은 일, 어쩌면 오지도 않을 일을 상상하고 대비하려는 마음은 때로 우리의 일상을 마비시킨다.


걱정은 조용히 자란다. 티 나지 않게 자라서 결국엔 정신을 잠식한다. 더구나 걱정은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과식하면 몸이 무겁고, 과음하면 속이 뒤집힌다. 하지만 걱정은 과해져도 경고음을 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위험하다.


무엇보다 걱정은 할수록 점점 더 커진다. 걱정이 또 다른 걱정을 낳고, 그 걱정은 다시 새로운 불안을 끌어온다. 그렇게 걱정은 연쇄적으로 증식하며 마침내 자기만의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나를 지키기 위한 도구였던 걱정은 어느새 나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버린다.


얼 나이팅게일이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고, 30%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12%는 타인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 10%는 건강에 대한 과도한 우려, 오직 8%만이 현실적인 문제라고 한다.


즉, 우리가 품는 걱정의 92%는 불필요하거나 비생산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이 통계를 통해 “걱정은 시간을 낭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자신감과 효율성을 갉아먹는 독”이라고 말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부분의 걱정은 허상이고 우리는 실제가 아닌 가능성에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행동이야말로 걱정의 해독제'라며 걱정보다 실천이 먼저라는 태도를 강조했다.


걱정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걱정은 한도 없는 신용카드가 아닐까. 필요할 때 적절히 사용하면 나를 보호해주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경계 없이 습관처럼 꺼내 쓰다 보면 감정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조심해서 살아가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준비 없이 무언가를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말하자면 스스로를 위한 경고등 같은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이 카드에는 명확한 ‘한도’가 없다는 점이다. 제한이 없다는 것은 자칫 무분별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불안은 예고 없이 반복 결제되고 머릿속은 끊임없이 ‘만약’이라는 가정으로 가득 찬다.


그렇게 감정은 마치 자동이체처럼 매일 새어나가고 나도 모르게 피로와 무력감이라는 이자를 지불하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감정의 누적은 커지고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가 된다.


마치 신용카드를 과도하게 사용하다가 연체에 빠지고 결국에는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처럼. 걱정은 그렇게 내 마음의 신용도를 깎아먹는다.


자신을 믿는 힘, 스스로를 회복하는 능력,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낼 여유마저 잃게 만든다. 마음은 점점 경직되고 현실은 마치 정지된 계좌처럼 아무것도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걱정이라는 감정에도 반드시 ‘사용 한도’를 정해야 한다. 내게 필요한 만큼만, 실제로 대비 가능한 수준까지만 말이다.


그래야 감정의 소비가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결국, 걱정은 통제되지 않으면 나를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는 시스템이 되어버린다. 걱정이라는 카드는 그래서 더욱 신중히 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걱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자 한다.


첫째, 걱정은 현실의 데이터로 점검한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 걱정이 내게 어떤 행동을 유도하고 있는가.


둘째, 걱정의 시간을 정해둔다. 하루 15분, 혹은 운동 후 샤워 전 10분. 그 시간엔 마음껏 걱정해도 된다. 하지만 그 시간 외에는 걱정을 멈춘다.


셋째, 걱정 대신 준비를 선택한다. 걱정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면 준비는 현재를 다지는 실천이다. 걱정의 언어를 ‘만약’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작은 해답이다.


걱정은 어쩌면 나를 향한 책임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고 실수 없이 살아가고 싶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마음.


그 모든 무게의 이름이 바로 걱정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책임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라 해도 그 걱정이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 나를 갉아먹는다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걱정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울타리가 되어야 하지, 내 안을 무너뜨리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를 지키기 위한 걱정이 어느 순간 나를 붙드는 족쇄가 되었다면 이제는 그 책임감의 무게를 다시 조율해야 할 때다.


나는 오늘 ‘걱정’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걱정은 인간다움의 일부지만 동시에 스스로 설정해야 할 ‘사용 한도’가 필요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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