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순수한 인상주의자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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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신비하다.
따지고 보면, 비가 얼어붙어 내리는 것일 뿐, 하등 특별할바 없는 겨울의 일반적인 기상이라 할지라도, 눈의 결정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을 덮는 모습은, 추운 겨울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는 배경과는 모순되게, 따뜻하고 포근하다. 추운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일 벌이는 아이들, 거센 추위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굳이 첫눈은 구분하여 세어보는 젊은 남녀도, 따뜻한 차를 두고 창 밖 눈 오는 풍경을 보는 중년까지, 모두가 각기의 이야기를 만들며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눈의 매력은 예술가의 눈길을 잡는다. 햇빛이 발하는 색상의 변화를 쫓는 인상주의자조차도 사로잡은 무색의 눈은 우리네 옛 화가의 붓도 흔들리게 하였다. 능호관 이인상의 ‘설송도’와 김득신의 ‘강천모설도’는 눈이 오는 모습을 그린 대표적인 그림이다.
표현은 다르다. 알프레드 시슬레가 눈 위에 반사되는 ‘빛’의 다양한 색감을 쫓았다면, 우리 화가들은 눈의 ‘본질적인 고요함’과 ‘비어 있음’을 그렸다. 적극적으로 눈을 칠하지 않는 ‘유백(留白)‘ 기법으로 투명하고 고요한 눈의 본질을 ‘그리고자’ 하였다. 물론, 새하얀 화선지에 어두운 먹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붓을 놀렸으니, 눈의 자리를 종이의 ‘하얀색’ 그대로 두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하겠지만, 하얀 물감까지도 덧칠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배경의 순수함이 눈의 본질을 보다 적확하게 전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어두운 먹으로 그리는 ’선‘을 활용하여 눈의 무게감을 동시에 표현하였다. 자칫 가지 끝이라도 부러질까 무겁게 내려앉은 나뭇가지 위의 눈은 그 아랫부분을 짙은 먹선으로 그려냄으로 재현해 내고, 커다란 바위는 굴국을 따라 거칠게 기르는 선으로 그 무게감을 묘사하였다. 아무 채색을 하지 않은 공간이 발산하는 비어있음의 무게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눈의 무게를 꿋꿋하게 버텨내는 소나무나 설중화의 강인한 생명력을 동시에 보여주고자 함이다.
[겨울 정원]
눈 쌓인 겨울 정원은, 알프레드 시슬레가 찾은 눈의 매력이 그러하듯이, 자칫 그냥 지나칠지도 모르는 그러나 독보적인 아름다움들이 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의 신록과 알록달록한 꽃의 색감이 없고, 아찔한 여름의 뜨거움과 그늘의 정반대이면서 또한 노랑부터 빨강까지의 다양한 속살을 드러내는 가을과는 다르다. 차갑고 건조한 겨울의 본질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겨울 정원의 연출이 있다.
[ 천리포 수목원 ]
겨울의 정원을 이야기하자면 천리포 수목원을 빼놓을 수 없다. 온화한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초록을 잃지 않는 이국의 따뜻함을 함께, 복수초며 호랑가시 열매 같이 겨울에 그 생명력을 발하는 소재들이 더욱 돋보이는 정원이다.
특히 이렇게 다양한 종류를 볼 수 있을까 싶은 만병초, 수국 그리고 작약류가 눈을 사로잡는다. 겨울에도 그 넓은 잎을 자랑하는 만병초의 다른 형태들을 찾아가다 보면 앙상히 남은 가지 끝에 꽃의 생기가 달아난 꽃대를 달고 있는 여러 모양의 수국과 작약을 볼 수 있는데, 생생함을 찾을만한 것이 없다 할 때 꿋꿋하게 그 받침들을 유지하는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천리포 수목원은 전에 소개한 김장훈 정원사가 가장 먼저 추천하는 겨울 정원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겨울이 오기 전 마른 줄기와 가지를 모두 베어버렸지만, 김정원사는 이를 그대로 남기어 마른 수풀사이로 바람이 지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이 쌓여 만드는 입체감을 겨울 정원의 독특함으로 강조하고 있다. 특히 눈이 내렸을 때 마른 초본류 위에 얹히는 '눈꽃'의 섬세한 선이 중요한 경관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세계적인 식재 설계가 피에트 아우돌프 역시, 겨울이 절정을 지나 이른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때를 ‘제5의 계절’이라 하여 정원의 새로운 멋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시기로 삼기도 한다.
좀 더 가깝게는, 정원의 겨울을 거닐면서 아래의 식물들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수국 (특히 목수국): 겨울 내내 마른 꽃송이가 그대로 달려 있어, 눈의 무게감을 가장 풍성하게 보여준다.
• 실억새 (Miscanthus): 겨울 정원의 풍성함을 만드는 주인공이다. 눈 속에서도 꼿꼿이 서서 서걱거리는 바람 소리를 만든다.
• 흰 말채나무 (Red-osier Dogwood): 눈 위에서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줄기가 압권이다. 시슬레의 그림에 나오는 따뜻한 색감의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