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아니라 소멸이 먼저 오는 시각
정오는 빛의 시간이 아니다.
소멸이 먼저 도착하고 빛은 그 흔적처럼 따라온다.
사람들은 정오를 밝음이라 부르지만,
그건 그림자가 완전히 실패한 순간을 가리키는 다른 말일 뿐.
그림자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빛이 완성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림자가 없어지는 쪽이 아니라 뜨거워지는 쪽을
먼저 본다.
정오의 빛은 비추지 않는다.
관통한다.
표면이 아니라, 가장 깊숙한 중심을 먼저 불태운다.
태양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부가 뒤늦게 타오르는 것이다.
정오란 하늘이 밝아지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쪽 온도가 외부에 노출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정오를 피해 걷는다.
빛 때문이 아니라,
내 내부가 외부처럼 보이는 것이 두려워서.
정오는 도착이 아니다.
정확한 소거다.
나는 오늘도 정오의 한가운데서,
빛이 아니라 지워지는 쪽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