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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01화

프롤로그: 청년의 넋두리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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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가 넘는 이력서를 보냈다. 유럽에서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보낸 것들이었는데,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정중한 거절의 메시지들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라는 '공급'에 대한 사회의 '수요'가 없다는 것을. 시장경제의 논리로 말하면 너무나 간단명료한 일이었다. 내가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포화상태이거나, 아니면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팔리지 않는 상품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은 상향 평준화되었다고 말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내며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높아진 기준에 따라가지 못해 도태된 것만 같다. 남들은 이미 앞서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기분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다른 글에서 귀국할 때 다른 나라로의 도망을 생각했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진짜로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밀려왔다.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 연장선에서 아슬아슬한 방황을 하고 있다. 어떤 날은 이런 내 모습에 울화통이 터진다. 왜 이렇게 나약한지,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또 어떤 날은 온몸의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운 날들이 있다. 그럴 때면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여행이 답이 될 수 있을까 싶어진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다는 걸 안다. 나는 결국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노답론(露答論). 답이 없는 강론이자, 아침 이슬처럼 덧없는 존재인 내가 그래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생각해 보니 결국 관점의 문제가 아닐까. 세상에는 수많은 철학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비슷하지만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사실 사람마다 다른 관점을 지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칸트의 정언명령, 사르트르의 실존, 공자의 인(仁)...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본 고유한 시선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취업에 실패하고,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21세기의 한 청년으로서, 내가 마주한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이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한 청년의 솔직한 넋두리에서 시작하는 사유들이다. 세상의 수많은 딜레마들 앞에서 흔들리는 나를, 완벽하지 않은 나의 관점을 글로 써 내려가며 나를 바로잡고자 한다. 아니, 바로잡는다는 표현도 거창하다. 그저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고자 한다.


이것은 해답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들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한 인간의 기록이다. 확실한 답을 찾기보다는,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계속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아침 이슬이 해가 뜨면 사라지듯 덧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은 철학자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선택과 판단의 연속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세계관을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이슬을 밟고 가는 여행자의 발걸음처럼, 확실하지 않지만 계속 나아가는 용기 있는 행위다.


혹시 이런 솔직함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처럼 방황하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철학의 숲에는 정답이 없다. 노답(No答)이다. 하지만 그 '답 없음' 자체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계속 걸어가는 것. 아침 이슬을 밟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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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