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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노답론 05화

데카르트의 악마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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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 데카르트는 『성찰록』에서 절대적 확실성의 기반을 찾기 위해 방법론적 회의를 감행했다. 그가 무대 위에 올린 주인공은 바로 '데카르트의 악마',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감각과 이성을 조작하는 절대적 기만자였다. 이 악마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 수 있으며, 외부 세계는 물론 우리 자신의 몸조차 무(無)로 만들 수 있는 존재였다.

데카르트는 모든 감각과 이성을 조작하는 이 궁극의 회의론적 도구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극한까지 확장하려 했다. 그리고 이 극단적 의심의 폐허 속에서 단 하나의 불굴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코기토였다. 설령 악마가 모든 것을 기만한다 해도, 기만당하는 '나'의 존재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이 대담한 시도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균열이 존재한다. 이 균열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코기토가 철학적 진리라기보다는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실존적 위로에 가까웠음을 발견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첫 번째 딜레마는 그가 설정한 악마의 존재를 실제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악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 도구로 사용된 가상의 시나리오였을 뿐이다. 데카르트는 가능한 모든 의심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기 위한 임시적인 가정으로 악마를 상정했지만, 정작 그 가정의 실재성은 검증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가상의 적과 싸워서 이겼다고 자축하는 것과 같은 허수아비 논증의 전형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위협을 설정하고, 그것을 극복했다며 승리를 선언하는 것은 철학적 엄밀성과는 거리가 멀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만든 허수아비를 자신이 무너뜨리는 연극을 벌인 셈이다.

더 나아가, 악마 가설 자체가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드러낸다. 그는 이 가설을 통해 코기토를 도출했지만, 정작 그 가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악마의 존재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코기토 이외의 모든 지식은 여전히 의심의 그림자 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와 선함을 논증하여 악마 가설을 최종적으로 배제하려 했다. 그는 인과론적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을 동원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신이 완전한 존재이므로 기만하거나 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서 치명적인 인간 중심적 가치 판단의 함정이 드러난다. 데카르트는 기만이나 악함을 불완전으로, 존재와 선함을 완전함으로 단정짓는다. 그런데 이런 가치 판단은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내린 것이다. 신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의 기준으로 신을 재단할 수 있을까?

신에게 기만은 자유의 발현일 수 있고, 더 큰 질서를 위한 필요악일 수 있다. 진실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제약일 수도 있으며, 존재 자체가 부담이나 속박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신의 무한한 계획에서는 완전성의 한 부분일 수 있다. 아니면 애초에 신에게는 선악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범주일 수도 있다.

데카르트는 명백한 순환 논리에 빠져 있다. 신은 완전하다고 가정하고(전제), 완전한 존재는 기만하지 않는다고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한 다음(추론), 따라서 신은 기만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결론). 하지만 이 추론에서 사용한 "완전함"의 정의 자체가 인간의 가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 모든 균열들을 종합해보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것은 철학적 진리라기보다는 실존적 불안에 대한 인간적 응답이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 불안—"나는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공포 앞에서, 데카르트는 뭔가 확실한 것을 간절히 원했다. 그는 사유하는 주체라는 고독한 존재론적 위치에서 발버둥 치며, 자신에게 "괜찮다, 너는 존재한다"고 말해주는 한 줄기 빛을 찾았다.

코기토는 철학적 엄밀성보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우선시한 결과물이다. 데카르트는 상상 속의 현실(악마라는 가정)을 통해 자신에게 일종의 인정욕구를 발휘했다. "적어도 의심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최소한의 확신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한 것이다.

이는 사막을 헤매는 여행자가 신기루를 보고 안도하는 것과 같다. 비록 그 오아시스가 실제로는 환상일지라도, 그 순간의 위로는 여행자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데카르트에게 코기토는 바로 그런 실존적 신기루였을 것이다.


이런 분석이 데카르트 철학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데카르트가 인간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기념비적인 시도였음을 보여준다.

철학도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며, 완전히 객관적이고 냉정할 수만은 없다. 데카르트도 불안하고 확신이 필요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의 철학은 본원적인 불안감과 그에 대한 인간적 응답의 솔직한 기록이다.

데카르트의 악마는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위협이었고, 신의 존재 논증은 인간 중심적 가치 판단에 기반한 순환 논리였으며, 코기토는 실존적 불안에 대한 자기위로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런 인정이야말로 더 정직하고 겸손한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한계를 인정한 후,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아마도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대신,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기초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유한한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의미 있는 삶을 구성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간이 얼마나 확실성을 갈망하는지, 그리고 그 갈망이 때로는 논리적 엄밀성을 희생시킬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는 철학의 실패가 아니라, 철학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소중한 증거다.

결국 데카르트의 악마와 코기토는 우리에게 묻는다. 진리 탐구인가, 자기위로인가? 아마도 답은 둘 다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가장 인간적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sejong.go.kr/prog/blog/citizen/sub04_02_01/view.do?mode=list&nttId=1202&pageIndex=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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