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잠들기 전의 당신과 오늘 아침 깨어난 당신이 정말 같은 존재일까?
이 순간에도 당신의 뇌 속에서는 수조 개의 뉴런이 전기 신호를 주고받고 있다. 각각의 신호는 양자역학적 사건이고, 각각의 사건은 확률의 지배를 받는다. 만약 그 중 단 하나라도 다르게 일어났다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생각도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공상과학 소설의 상상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현대 물리학이 제기하는 진지한 질문이다. 1935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제시한 유명한 사고실험은 단순히 고양이 한 마리의 생사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 자체의 본질, 우리 존재의 근본적 불확실성에 대한 날카로운 탐구였다.
상자 안의 고양이가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 역시 매 순간 존재할지 존재하지 않을지 확실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이 질문은 철학적 사변이 아닌 물리학적 현실이 된다.
슈뢰딩거의 실험은 단순하면서도 섬뜩하다.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고, 그 옆에는 가이거 계수기, 방사성 원소, 망치, 독가스가 든 플라스크가 놓여 있다. 방사성 원소가 1시간 내에 붕괴할 확률은 정확히 50%다. 만약 원소가 붕괴하면 가이거 계수기가 이를 감지하고, 망치가 플라스크를 깨뜨려 독가스가 나와 고양이가 죽는다. 붕괴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있다.
여기서 양자역학의 기묘함이 시작된다. 우리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양자역학의 원리에 따르면 방사성 원소는 '붕괴한 상태'와 '붕괴하지 않은 상태'의 중첩(superposition)에 있다. 따라서 고양이 역시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의 중첩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관측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다.
슈뢰딩거가 제시한 중첩 상태의 역설을 받아들인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57년 휴 에버렛 3세가 제시한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은 고양이의 운명을 넘어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더욱 현기증 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양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우주는 갈라진다. 고양이 실험에서는 두 개의 평행 우주가 생겨난다. 하나는 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 다른 하나는 고양이가 죽은 우주다.
다세계 해석은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 개념을 물리학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무수히 많은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를 선택해 현실화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에버렛의 다세계에서는 신의 선택이 필요 없다. 모든 가능한 세계가 동시에 실현된다.
이는 철학적으로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현실성(actuality)과 가능성(possibility)을 구분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energeia)와 가능태(dynamis)를 구분했고, 가능한 것들 중 일부만이 현실화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다세계 해석에서는 이런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모든 가능한 것이 어딘가에서는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다세계 해석이 이렇게 급진적인 철학적 함의를 갖는다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는 어떻게 적용될까? 매 순간 우리 주변에서는 수없이 많은 양자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뇌의 뉴런 하나하나에서, 우리가 마시는 공기의 분자들에서, 심지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에서 말이다.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이 모든 양자 사건들이 우주를 끊임없이 분기시킨다.
어젯밤 잠들 때의 당신이 경험한 양자 사건들과 오늘 아침 깨어난 당신이 경험한 양자 사건들 사이에는 수많은 분기점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분기에서는 당신의 뇌세포 하나가 다르게 발화했을 수도 있고, 그 결과 완전히 다른 꿈을 꾸었을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당신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양자 상태가 달라져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는 개인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로크는 의식의 연속성을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설명했지만, 다세계에서는 수많은 '나'가 동시에 존재한다. 과연 그들 모두가 같은 '나'일까? 아니면 각각이 서로 다른 개체일까? 데렉 파핏이 제기한 개인 정체성의 난제가 양자역학을 만나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다세계의 무한한 분기 속에서 또 다른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우리의 의식이 현실을 결정하는 것일까?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측'이 파동함수를 붕괴시켜 하나의 확정된 상태로 만든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관측'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이 질문은 18세기 철학자 조지 버클리의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버클리는 물질세계의 존재 자체가 지각하는 정신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양자역학의 의식 중심 해석은 놀랍게도 이런 관념론적 사고와 맥이 닿아있다.
일부 물리학자들은 의식 있는 관측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의식이 개입해야만 양자 상태의 중첩이 붕괴되어 하나의 현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순간 실제로 그 대상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는 우리가 상자를 여는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심각한 철학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첫째는 의식의 정의 문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의식을 존재의 근거로 제시했지만, 정작 의식 자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고양이도 의식이 있지 않을까? 박테리아는? 컴퓨터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의식 있는 관측자'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둘째는 독아론(solipsism)의 함정이다. 만약 의식이 현실을 결정한다면, 나의 의식만이 진짜이고 다른 모든 것은 나의 관찰에 의존하는 것일까? 이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비판받아온 독아론적 사고로 빠질 위험이 있다.
셋째는 인과관계의 역전 문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존재하는 현실을 의식이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식이 현실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이 인과관계를 뒤바꾼다. 이는 칸트가 지적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현실과 인식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직관과 충돌한다.
의식과 관측의 철학적 딜레마가 이처럼 복잡하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행히 거시세계에서는 디코히어런스(decoherence) 현상 때문에 양자 효과가 빠르게 사라진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관측하지 않아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이것이 양자 상태를 '관측'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혹시 지금 이 순간, 다른 평행우주의 당신은 다른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시 우리의 의식이 정말로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물리학의 경계를 넘어선다. 양자역학과 의식, 다세계와 정체성에 대한 모든 논의가 수렴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마주한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현실이 사실은 얼마나 불확실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적 불안'과 맞닿아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던져진 존재(geworfene Existenz)'로서 확실한 근거 없이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했다. 양자역학은 이런 실존주의적 통찰을 과학적 언어로 번역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확률과 불확실성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다세계에서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다. 하지만 그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나'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다. 각각의 평행우주에서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진 '나'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매일 밤 잠들 때, 우리는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날 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는 8시간이라는 의식의 공백이 있다. 다세계 해석이 옳다면, 그 사이에 수없이 많은 평행우주가 갈라져 나갔을 것이고, 오늘 아침의 나는 그 중 하나의 분기에서 깨어난 나일 뿐이다.
이런 사고는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니체는 우리가 같은 삶을 무한히 반복해서 살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다세계에서는 오히려 무한히 다른 삶들을 동시에 살고 있다. 모든 순간이 갈래길이고, 모든 가능성이 현실화된다.
이것이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희망적이기도 하다. 만약 정말로 무수히 많은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어딘가에는 더 행복한 나, 더 성공한 나, 더 사랑받는 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선택들이 미래의 나를 결정할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부조리한 세계에서도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했다. 양자역학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확실성의 환상을 버리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가능해지는 자유와 가능성을 긍정할 수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여전히 상자 안에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 그 상자를 열어보며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다. 불확실성 속에서, 하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세상에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양자시대를 사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