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가 모피어스 앞에서 두 개의 알약을 마주했을 때, 그 순간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은유였다.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18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제시한 사고실험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1814년, 라플라스는 『확률의 철학적 시론』에서 한 가지 가정을 제시했다. 만약 우주의 모든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히 알고,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계산할 수 있는 지성이 있다면 어떨까? 그 지성은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후대 학자들이 이 가상의 존재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명명했다.
라플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이다." 이는 우주가 거대한 시계장치처럼 작동한다는 기계론적 결정론의 극치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우연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라플라스의 사고실험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작품이다. 기계들이 만든 시뮬레이션 속에서 인간들은 자신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네오가 스푼을 구부리려 할 때 아이가 말한 "숟가락은 없다"는 대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자체가 허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기계들은 라플라스의 악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 매트릭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미 계산되고 예정된 것이다. 인간이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 알고리즘의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욱 복잡한 역설을 제시한다. 오라클은 미래를 예언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선택은 이미 내려졌고, 우리는 단지 그 이유를 이해하려 할 뿐이다." 이는 자유의지 자체가 더 큰 결정론적 계획의 일부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 불편한 진실은 네오의 '선택' 자체가 이미 계산된 변수라는 점이다. 아키텍트는 네오에게 그가 여섯 번째 '더 원'이라고 밝힌다. 이전의 다섯 명도 모두 같은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같은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결국 예측 가능한 결정을 내렸다. 네오의 '자유로운' 선택조차 시스템의 오차 보정 메커니즘의 일부였던 것이다.
여기서 더욱 섬뜩한 메타적 진실이 드러난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워쇼스키 자매야말로 진정한 라플라스의 악마다. 그들은 각본을 통해 네오의 모든 선택을 미리 결정해놓았다. 네오가 빨간 알약을 선택할 것도, 트리니티를 사랑하게 될 것도, 최종적으로 희생을 택할 것도 모두 시나리오 작가들이 이미 써놓은 대로다.
네오는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그는 각본이라는 절대적 결정론의 틀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그의 모든 대사, 모든 행동, 심지어 자유의지에 대한 고민까지도 이미 대본에 적혀있다. 관객인 우리조차 네오의 선택을 지켜보며 감동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는 우리 현실에서의 자유의지 문제를 더욱 날카롭게 비춰준다.
이는 라플라스의 악마의 가장 무서운 함의를 보여준다.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믿는 것 자체가 이미 계산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반항하려는 충동이, 의문을 품는 것이, 심지어 이 글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끼는 것까지도 모두 예정된 반응이라면?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네오가 트리니티를 구하기 위해 인류의 멸망을 무릅쓰는 선택을 할 때, 그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도 이미 계산된 것이었다. 아키텍트는 이를 예상했다. 심지어 그것을 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해 이용했다.
하지만 이것도 또 다른 층위의 결정론에 불과하다. 영화라는 매체의 관점에서 보면, 네오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사랑이 시스템에 이용당하는 것도, 심지어 아키텍트가 그것을 예상하는 것까지도 모두 워쇼스키 자매의 각본에 따른 것이다. 영화 속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조종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 인공지능들조차 더 상위의 존재(시나리오 작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우리가 직면한 상황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우리가 가장 인간적이고 자유롭다고 여기는 순간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 정의를 위한 투쟁, 진리를 향한 갈망. 이 모든 것이 더 큰 각본(물리법칙, 진화, 사회구조)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거대한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라플라스의 악마는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양자역학은 우주의 근본적 무작위성을 제시하며 고전적 결정론에 균열을 내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무작위성이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가 자유롭다고 해서 주사위의 결과 자체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현대 신경과학은 또 다른 충격을 준다. 벤자민 리벳의 실험은 중요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의식적 결정이 내려지기 수백 밀리초 전에 뇌에서 이미 행동 준비 전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이미 그 결정을 내린 후인 것이다.
현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은 우리의 일부 행동 패턴을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쇼핑 추천, 광고 타겟팅, 콘텐츠 알고리즘 등에서 우리는 이미 예측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과학적 발견들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자명하게 여겨왔던 '주체로서의 나' 개념 자체를 뿌리부터 흔든다. 만약 우리의 결정이 의식보다 먼저 뇌에서 만들어지고, 우리의 행동이 알고리즘으로 예측 가능하다면,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나의 주인인가? 이 질문이 이제는 더욱 어두운 의미를 갖는다.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 자체가 더 큰 시스템의 부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성, 우리의 고유한 선택 패턴, 심지어 우리의 반항심까지도 모두 예측 가능한 변수들일 수 있다.
현대 기술이 우리의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완벽한 예측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오차와 예외가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행동은 점점 더 예측 가능해질 것이다. 언젠가는 정말로 디지털 라플라스의 악마에 가까운 것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점의 전환이다. 설령 우리의 행동이 물리적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과정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중심이라고 믿는 그 믿음 자체도 시스템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을.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진정한 현실을 마주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깨어난 현실 역시 또 다른 층위의 매트릭스일 수 있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이 거대한 시뮬레이션의 일부라면,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회의주의적 질문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 필요는 없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듯이, 의심하는 주체만은 확실히 존재한다. 설령 우리가 프로그램된 존재라 하더라도, 그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의식의 경험은 부정할 수 없다.
전통적인 자유의지 개념이 도전받는 지금, 우리는 더욱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네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자유의지가 제한된다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 자체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네오가 선택의 순간에 느끼는 갈등, 고뇌, 그리고 최종적인 결단의 순간까지도 모두 계산된 반응이었다면? 그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그 감정 자체가 프로그래밍된 것이라면? 이는 자유의지에 대한 전통적 논의를 완전히 뒤엎는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실존한다는 가정 하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단순히 환상이 아니라 조작된 환상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끼도록 설계되었다. 그 '느낌' 자체가 더 큰 시스템의 통제 메커니즘인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인과관계에서 벗어나는 것도, 자신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가치관과 행동 양식 자체가 이미 주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우리가 조작되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의 모든 의심과 저항, 심지어 이 질문 자체까지도 시스템이 허용한 범위 내의 반응일 수 있다면? 이러한 조작된 환상 속에서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네오가 매트릭스 안에서 아무리 자유롭게 행동해도 결국 프로그램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더 큰 결정론적 시스템의 경계 안에서만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플라스의 악마는 우리에게 가장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자유의지에 대한 우리의 고민, 심지어 이 에세이를 쓰고 읽는 행위까지도 모두 예정된 시나리오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 그 질문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나름의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까지도 모두 계산 안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더 큰 시스템의 일부였듯이,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자유의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고 해서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의문 자체가 시스템을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피드백 루프의 일환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절망일까, 체념일까? 아니면 여전히 희망이 있을까? 이 질문들조차 이미 각본에 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질문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조작된 것일지라도, 우리가 경험하는 고민과 괴로움, 그리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 자체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이다.
매트릭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네오는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자유는 불가능할지라도, 주어진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조작된 선택일지라도 말이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모든 것을 계산했다 하더라도, 그 계산을 실행하는 것은 결국 우리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여전히 경험하고,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그것이 프로그램된 것인지 진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진실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211214236952160&id=106369204103331&set=a.128908678516050https://kr.pinterest.com/pin/70861394132876401/,